공감하는 마음으로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단연 기후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유수의 과학자와 저명한 학자들이 강연에서 말합니다. 지구가 5도가 되면 멸종한다고. 실제로 지구 온도가 2도가 되는 순간 헤아릴 수 없는 가속도가 붙어서 5도로 가는 걸 막을 수 없게 된다고 말이죠. 저처럼 하루를 바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후위기는 결코 ‘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기 전까진 말이죠. 그런데 우리 모두 기후위기가 정말 올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건 현재 진행형이고요.
어린 꼬마마저도 손바닥만 한 마스크를 쓰고. 생채 첫 기관인 어린이집을 들어가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도 눈 밑으론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코라도 잠시 풀라고 마스크를 내렸을 때 그 얼굴이 얼마나 생소할지. 지금껏 함께한 친구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처음 보는 사람인냥 낯섦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요?
2020년 이후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나중에 기억이나 할 수 있게 될까요? 우리 아이들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알고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요?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과연 우리는 기후위기에 대해 콧방귀나 뀌었을까요? 그저 기후위기는 내가 아닌 북극곰이나 코끼리 같은 먼 나라의 동물들의 위기라고만 생각했을 겁니다. 그것도 평생에 몇 번 가지도 않았던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었던 동물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기후를 포함해서 우리는 자연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모두 동의하리라 생각됩니다. 기후를 나 몰라라 여겼던 과거의 시대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자연 앞에서 거만하게 굴다가 큰코다치고는 이내 우리 역시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렇담 이제 자연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소통을 한다는 건,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지?’, ‘나랑 맞는 사람일까?’처럼 말이죠. 그러고 나서는 상대방에 대해 알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바로 ‘상대방을 공감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할 때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하고서 ‘흥! 어디 한번 내 마음을 열어보시지.’라고 생각한다면, 소통은커녕 상대방이 다가왔다가도 화들짝 놀라곤 뒷걸음치며 도망가게 될 겁니다. 이는 소통을 맺고자 하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다는 걸 말하니까요.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더해서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면, 소위 아이들이 말하는 ‘단짝’을 얻고 싶다면, 공감은 필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공감은 뭘까요? 공감은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의 어느 부분과 맞닿게 맞추어서 마치 상대방의 마음이 어떨지 이해하고 함께 느끼는 걸 말합니다. 어려우신가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엄마, 나 축구하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 다쳤어~”
“아~ (얼굴을 찡그리며 마치 자신이 다친 것처럼) 아팠겠다~ 이리 와봐 약 발라 줄게.”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죠? 아이를 키우다 보면 무수히 겪게 될 일입니다. 여기서 ‘아~~(얼굴을 찡그리며 마치 자신이 다친 것처럼)’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한 번은 다쳐봤던 경험이 있었을 테니, 당연히 아이의 아픔을 엄마도 느낀 겁니다. 그 순간에, 엄마도 아이처럼 상처가 난 듯이 말이죠. 그 아픔이 어떤 건지 자신이 경험했던 아픔 중 하나를 꺼내어서 아이의 아픔과 맞대어 본 겁니다. 그리고는 아이가 얼마나 아팠을지 함께 느끼고 공감한 겁니다. 어떠신가요? 이해가 조금은 더 되시나요?
우리는 이런 공감을 자연과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과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아이들은 동물들을 친구로 여깁니다. 하다못해 길가의 돌과도 대화를 합니다. 저희집 큰아이가 어렸을 때, 이런 이야기를 곧잘 했습니다. “엄마, 달이 자꾸 따라와. 나를 좋아하나 봐”하고 말이죠.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릴 때면 창밖의 달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생각했던 거죠. 아이들은 모든 사물, 자연을 넘어서 우주와도 소통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의 공감 능력인 것이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공감 능력을 이미 디폴트 값으로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아이의 눈맞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눈을 피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일수록 말이죠. 그런데 그 능력은 점점 나이가 들어 상대방의 눈을 피하기 시작하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아이들은 어쩌면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태어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연을 착취하려고 하거나 이용하려는 마음이 없으니까요. 아이들은 그저 사이좋게 지내려고만 합니다. 어른들과는 다르죠. 우리 어른들은 자연을 마치 재물처럼 소유하고 사용하려고만 하니까요. 그러다 어떻게 되었나요? 우리는 지금 자연에게 회초리를 맞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연은 우리꺼’가 아니라 ‘내가 자연꺼’라고 말이죠. 홍수 앞에, 지진 앞에, 산사태 앞에, 기후 앞에, 우리는 무력한 존재라는 걸 새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서 아이들과 같이 자연과 소통해야 합니다. 자연을 친구로 여기고 공감하면서 상호작용하는 우리 아이들처럼. 소통은 ‘서로’, ‘주고받으며’ 하는 겁니다. ‘함께’, ‘협력하듯이’ 말이죠. 그럼 자연과 화해하는 날이 곧 오리라 생각됩니다. 그날을 기대해 보죠. 우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마가복음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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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호 <씨튼가족> 간행물 - 通通한 이야기로 소통시리즈에 게재한 저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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