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지 감독, 唐伯虎點秋香 Flirting Scholar 1993
즐겨보는 TV프로그램 중 하나가 일요일 오전 KBS 1TV에서 방송되는 [TV쇼 진품명품]이다. 시청자들이 소장하고 있는 가보, 유물을 갖고 나와 전문가들의 감정을 통해 값을 매기는 프로그램이다.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이런 컨셉의 프로그램이 중국에서 만들어진다면 꽤 볼만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비록 10년 간 문화대혁명의 불구덩이를 지났지만 중국 각지에 흩어진 수많은 유물이 하나씩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흥분을 자아내는 일인가. ‘진품명품’에 나올만한 소재를 다룬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홍콩 최고의 희극 영화인 주성치의 1983년도 [당백호점추향]이란 작품이다. 제목 설명을 하자면 ‘당백호’라는 인물이 ‘추향’이라는 여자애를 ‘찜’했다는 이야기이다. 당백호가 누구일까. 인물에 대해 먼저 소개한다.
당백호(1470-1523)는 명대 실존인물이다. 소주(蘇州) 사람으로 寅月寅日寅時에 태어났다고 하여 이름은 인(寅)으로 지었다. 백호(伯虎)는 자(字)이다. 어릴 때부터 경서에 해박했던 그는 글과 그림, 글쓰기에 천부적인 재질을 보였다. 그는 나이 스물여덟에 향시에서 해원(解元)이 된다. 하지만 이후 중앙 무대에 진출할 뻔 했지만 과거 부정에 부당하게 연루되면서 이후 관(官)에 대한 반감을 품고 죽을 때까지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詩-書-畵’에만 열정을 쏟는다. 그가 중국 곳곳에 남긴 그림과 글씨는 오늘날 ‘TV진품명품’에 나온다면 엄청난 감정가를 받게 될 것이다.
내게 유홍준 문화재청장(*2005년에 쓴 글임*) 같은 안목이 없지만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을 평하기를 “그림은 재기가 충만하고 서법은 영활하여 수재의 기운이 꿈틀거린다.고 한다. 그가 살았을 당시 소주 일대에 그와 함께 어울리던 문사들, 문징면(文徵明,征明), 축윤명(祝允明,枝山), 서정경(徐禎卿)과 함께 강남 사대재자(江南四大才子)로 칭해진다. 이 영화에도 이들 네 명의 패거리가 나온다. 그 중 축지산(진백상)이 가장 친한 단짝으로 나온다. (우리나라의 장승업처럼)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원한에 찬 작품 활동을 한 당백호는 자신의 작품에 곧잘 ‘강남제일풍류재자'(江南第一風流才子)라는 낙관을 남겼다. 이 때문에 당백호는 문단의 플레이보이 정도로 인식될 수도 있다. 게다가 그와 관련하여 ‘구미도'(九美圖)라는 그림과 관련하여 9명의 처첩을 거느린 대단한 인물로 전해 내려온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수준이다.
이력지 감독은 주성치판 ‘당백호’를 재밌게 만들어낸다. 뛰어난 서화 재주를 가진 당백호에게 글 한 편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 중에는 축지산도 끼어있다. 영화에서 당백호(주성치)가 축지산(진백상)의 온 몸에 먹물을 끼얹어 온 몸을 붓 삼아 널따란 종이 위에 글과 그림을 쓰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축지산은 주성치의 가까운 친구이며 그림 솜씨가 별로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그도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어쨌든 당백호의 솜씨는 신의 경지에 이른다. 그가 붓을 들고 한번 허공에 휘젓기만 하면 그야말로 ‘TV진품명품’의 억대 작품이 그냥 펼쳐지는 셈이다. 그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면 와이프가 8명이나 되지만 하나같이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지 못하는 철딱서니라는 것이다. 의기소침해 있는 당백호는 어느 날 사당에서 눈이 번쩍 뜨는 여인을 만난다. 바로 화(華) 대부(相國)집 하녀 추향(공리)이다.
당백호는 추향이를 얻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화 대부집 하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타고난 말솜씨+ 글재주+ 임기응변으로 화 대부집 두 아들의 글 선생으로 눌러앉는다. 알고 보니 화대부 집 큰 마님(정패패)은 무술의 달인. 한편 추향이는 당백호의 문집을 몰래 훔쳐보면서 당백호의 문장력과 그림솜씨에 빠져있다. 하지만 진짜 당백호가 옆에 있어도 그가 당백호인 줄을 모른다. 당시에는 TV도, 인터넷 블로그도 없었으니 당연할 수밖에. 언젠가는 오직 실력만으로 그의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날 화(華) 대부와 라이벌 관계인 조정의 녕(寧)왕이 들이닥친다. “나에게 당백호의 절대그림이 있다”고 자랑한다. 여기서 당백호의 진품명품 그림을 앞에 두고 일대 격전이 펼쳐진다. 정패패와 유가휘가 한바탕 일진광풍을 일으키더니 은인자중하던 당백호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일필휘지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니 이 주성치같은 놈이 진짜 당백호였단 말인가!”
어쨌든 유가휘와 필묵을 앞에 두고 [쿵푸 허슬]의 원안이 되는 액션 씬을 선보인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결국 당백호는 추향이를 얻게 되면서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끝난다.
[당백호점추향] 이야기는 우리나라 ‘홍길동’이나 ‘심청’, ‘연흥부’ 이야기처럼 전설과 실제를 오가며 중국인들의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이야기는 실제 당백호가 대갓집 하녀를 와이프로 얻는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외전도 전해진다. 바로 [구미도](九美圖)이다. 내용을 조금 소개한다.
어느 날 ‘친구’ 축지산이 당백호를 찾아온다. 당백호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더니 “자네는 여자 그림은 별로군.”이라고 말한다. 이에 당백호가 발끈하고 두 사람은 내기를 건다. “기한을 줄 테니 절세미인 규수 열 명을 제대로 그려보게나.”라는 것이다. 당백호는 300냥 내기를 걸기는 했지만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당시 사회풍습상 규수방 아가씨를 모델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 노릇. 다 큰 처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게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낭패에 빠진 당백호에게 서동이 아이디어를 하나 내놓는다. 동네 사당에 규수들이 향불 붙일 때 몰래 엿보고 그림을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당백호는 매월 초 사당에서 향촉에 불을 붙이는 예쁜 아가씨 인물을 살펴보고는 작품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만약 이 그림이 남아있다면 [모나리자]만큼은 값어치가 나갈 것이지만 중간에 소실된다. (그렇게 알려졌었는데....) 이 그림이 청대 건륭연간에 어느 소생 손에 들어간다. 그림은 원래 여자의 뒷모습만이 그려졌는데 이 소생은 이 그림의 완전히 푹 빠져서는 술만 마시고 날로 야위어 가는 것이다. 피골이 상접해지자 가족들이 걱정에 또 걱정. 백약이 무효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또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이 소생이 잠들 때 그림의 배경은 똑같이 두고 여자의 뒷모습을 앞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후 소생은 환상에 깨어나 건강하게 잘 지냈다는 것이다. 그 후 그림은 어찌 되었냐고. 기대하시라. 이번 주말 KBS 1TV 진품명품 시간에 방송된다. 진짜냐고? 그 시간에 MBC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진다고 한다. 진짜루? 물론 가짜!
주성치 영화 리뷰에서 이런 ‘진품명품’적인 리뷰를 하다니… 영화는 어쨌든 무진장 웃긴다. 주성치가 진백상을 붓 삼아 그림 그리는 장면과 마지막에 유가휘와 붓과 화폭을 잡고 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정말 기발하다. [쿵푸 허슬]에서 중국악기를 내세워 싸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주성치는 이미 자신의 영화에서 중국적 소재를 적극 활용한 셈이다. 이 영화에 유가휘와 정패패가 등장하여 고수의 무술 실력을 보여주는데 무협 팬들로서도 반가운 광경이다. ⓒ박재환 영화리뷰 2005/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