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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프로 Feb 21. 2024

2년간 술을 마시지 않으니 보이는 것들

30년도 넘게 마시던 술을 단칼에 무 자르듯 술 마시기를 멈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세 차례쯤의 금주 실패가 있었고, 실패한 금주 기간은 최장 6개월 정도였다. 술을 끊기에 나는 술을 너무 사랑했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잠들었다가 새벽녘 깨어 한심하고 불쾌한 기분에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술이 좋아, 가족이 좋아?'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어기적 거렸다.

당연히 술보다 가족이 우선이지,라는 생각은 이성적으로는 가능했으나 술도 즐기며 가족도 챙길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고 그걸 깨달은 것이 술을 끊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담배를 끊은 지는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래전일이라 가물가물한데 결혼 전이었으므로 아내는 내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알지 못한다. 담배를 끊은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나는 그동안 담배를 안 피워서 생긴 이득을 챙겨보았다. 체감되지는 않지만 용돈이 절약되었을 것이고 몸에서 냄새도 나지 않게 되었고 건강에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술을 2년간 마시지 않아서 생긴 좋은 점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과 소원했다가 좋아졌다던가 없던 대화가 많아졌다든가 하는 변화는 없다. 원래 연년생 사내아이 둘이라 살갑고 끈끈한 표현은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아이들이 나의 금주 변화에 감사하고 내가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알아주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내는 말해서 뭐 할까. 아내는 나의 금주를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기적처럼 여기고 황홀해한다.  그런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금주 포상이다.

'금주'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나의 행동이 너무나 단호하고 결연하여 우리는 저녁 식사 때에 내가 술을 마시며 취한 목소리로 혼자 횡설수설하던 2년 전을 먼 과거처럼 얘기한다.

'아빠가 술 마셨을 때는...'으로 시작하는 아이들과 아내의 당시 회고를 나는 묵묵히 듣는다.

내가 금주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들과 아내는 지금까지도 정말로 힘들어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 동안 세상도 변했다.

보통 아내와 함께 마트엘 가는데 이마트트레이더스와 코스트코는 내가 집에 쟁여 놓을 각종 술을 구입하는 곳이다. 주차장이 3층이고 매장이 있는 2층으로는 무빙워크로 내려가게 되는데 매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술 섹션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술 섹션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소주와 맥주, 수입산 맥주, 사케, 바이주, 와인, 위스키 등이 넓은 구역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매대별로 다른 종류의 술을 정리해 두었는데 지금은 기존의 술 구역 측면에 또 하나의 섹션을 만들어서 더 다양해진 술들을 판매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술을 마시지 않은 지난 2년간 세상은 하이볼과 싱글 몰트 위스키 열풍이 불어서 인기를 끌었고, 젊은 MZ세대를 겨냥한 저알콜도수 소주와 칼로리를 낮춘 스테비아 소주 등 신제품 소주가 새로운 병과 라벨로 변신했다. 국산 맥주도 예전보다 종류와 브랜드가 늘어서 이제는 낯선 술병들이 한둘이 아니다.

내 생업인 영상콘텐츠 전공과목 지도를 위해서 유튜브 콘텐츠를 자주 보게 되는데 방송법이나 방송 심의를 거치지 않는 1인미디어에서 연예인들이 술을 마시며 게스트와 대화를 나누는 콘텐츠는 어느새  인기 카테고리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물 간 연예인이나 술과 관련하여 자기만의 특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연예인들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게스트를 부르고 함께 술을 마시며 술과 술안주를 주제로 또는 술을 마시며 나누는 술집 풍경을 보여주며 연예인이 술에 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콘텐츠를 몇 편 봤는데 이들은 자신의 음주 경력과 주량, 술에 취한 경험들을 거리낌 없이 공개하고 있다. 이런 콘텐츠에 출연한 한 여자 게스트는 술을 잘하지 못하는 자신을 중요한 결함이 있는 것처럼 부끄러워했고 주당으로 알려진 호스트는 '한 수' 지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보통 이상의 주량과 기이한 음주경력은 이들에게는 훈장 같은 것처럼 보였다.

보건소나 병원에 방문하면 알코올중독 여부를 판단하는 질문지를 주곤 하는데 그것에 비추어볼 때 그들 대부분은 중증 알코올중독자이고 그런 연예인들의 술 경험담이 풍류와 매력으로 비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들의 콘텐츠는 난잡한 포르노 영상과 비교해도 그 해악의 정도가 결코 낮다고 볼 수 없었다.


술을 마시지 않게 되니 새삼 술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강력하게 침투해 있는지가 보인다.

술 한잔에 시름을 덜고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게 해주는 술자리는 힘들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시름을 달래도, 그렇게 마음을 털어놔도 다음날 달라지는 것은 내 상한 몸과 혼탁해진 마음뿐이다.

그 정도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술기운이 부른 엉뚱한 용기와 증폭된 심리로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하거나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거나 하면 안 될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상대에게, 내가 일으킨 사고에 피해를 입은 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술에 취해서 한 일이었다고 주억거리게 된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우리 사회는 아직 술에 관대하다.

1급 발암물질에 가공할 만한 중독성을 가진 이 독극물을 24시간 어디에서나 천 원짜리 몇 장으로 구할 수 있다. 고등학생이 한 시간을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으로 만취가 가능할 만큼의 술을 구입할 수 있다.

미국은 각 주마다 주류 판매법이 다른데 캘리포니아는 새벽 2시가 넘으면 술을 팔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바가 두시에 영업을 종료한다. 조지아 주는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는 아예 종일 술을 팔지 않는다. 엄격한 몰몬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는 유타 주에서는 더 심한 규제가 있다.

음주운전 경력이 있어도 장관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는 한국에서는 상상이 어려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규제안의 마련이 아니라 술을 규제해야 하는 것이 이슈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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