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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Mar 03. 2019

덕업일치가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 


'덕업일치'는 덕후들의 꿈이다.

덕업일치 : 덕질과 직업이 일치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을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 사실 덕후들 뿐만 아니라 모든 직장인들의 꿈일지도 모르겠다.

매일매일 출근하는 것 자체가 전쟁터에 뛰어드는 기분인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 말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다. 게다가 돈도 번다! 내가 좋아하는 걸하는데 회사에서는 돈을 준다. 회사에 충성을 다하며 시키는대로 넙죽 넙죽 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드라마 기획PD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갈 때도 친구들은 취업 생각해서 점수만 되면 일단 경영학과에 지원할 때, 나는 재밌게 공부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부모님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자신 있게 문예창작과를 들어갔고 내심 공무원 준비를 바라셨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겠다고 큰소리쳤다. 다행히도 전공은 적성에 잘 맞았고 첫 직장도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회사에 잘 들어갔다. 드라마를 너무 좋아했고 그래서 드라마 제작사에 취업했으니 사실상 '덕업일치'에 성공한 셈이었다.



어쩐지 술술 풀린다 생각했다. 내 인생이 그럴 리 없는데!  

남들 부러워할 덕업일치에 그야말로 꽃길이 열리는 줄 알았지만 세상 내 인생의 암흑기는 그때였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드라마를 업무 시간에 볼 수 있다면? 

회의 시간 내내 드라마 얘기를 한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마도 누군가는 '와- 편하게 일한다.'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을까? 재밌겠는데.'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물론 행복했다. 닥치는 대로 콘텐츠를 흡입하며 새로운 아이템을 찾고, 들어온 대본을 검토하면서 신선한 작가를 발굴하는 일. 이 대본이 드라마로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일. 그야말로 꿈꾸던 일이었고 내 평생의 사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한 일 년간은 그랬던 것 같다. 열정으로 충만했고 워라밸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런건 평범한 직장인들이나 하는 생각이지. 나는 드라마 만드는 사람인데? 라는 이상하고 오만함 쩌는 사상으로 물들여있던 때였으니까. 게다가 지금 생각해보면 딴 생각을 할 틈 자체가 없었다.

과연 내가 맞게 잘 가고 있는 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따져볼 틈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획PD는 보통 작가와 함께 하는 대본 회의에 수시로 참석한다. 이게 가장 큰 일상이다. 언제 하냐고? 음, 작가가 대본을 보내왔을 때, 작가가 대본이 안 풀릴 때, 방송국에서 대본이 이상하다고 할 때, 그냥 대표님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작가가 별 일 없이 있는 것 같을 때 등등... 

수다가 8할을 차지하는 아주 사소한 회의부터 대본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까지 수시로 내 일상을 침범했다. 

'침범'이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쓴 이유는 회의 스케쥴은 나의 업무시간 혹은 쉬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를 업무시간에 시작해도 워낙 길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보통 퇴근 시간 전에 끝나는 일이 많지 않다. 2-3시간 정도에 끝나면 짧은 거고 점심때 만나 막차시간까지 회의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온에어 중에는 집에 못 들어가니 예외라 치고.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사실 '마라톤 회의'나 '막차'따위가 아니다.

이렇게 장 시간 회의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각자 할 얘기들도 많다는 것이다. 할 얘기가 많으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하고. 보통 내가 만났던 작가와 감독들은 경력이 10년 이상인 베테랑이 대부분이었다. 엄청난 짬으로 무장들을 하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들 있단 말이다. 그런 작가, 감독 사이에서 초짜 기획PD인 내가 말 한마디라도 해서 도움이 되어야 밥값한다 할 수 있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드라마의 국적, 장르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봐야합니다. (안개의 넷플릭스 화면)



본다. 아주 미친듯이. 닥치는대로! 


당시 방영되는 드라마를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보통 대화를 최근 드라마 동향으로 시작하니까.그리고 대화를 하다보면 꼭 자주 등장하는 작가와 감독들이 있다. 그들의 과거 작품들도 알고 있어야 대화가 된다. 회의 중에 '저게 무슨 얘기지?' 하는 표정이 드러나는 순간, 내 존재의 이유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쥐구멍으로 숨고 싶어지고. 그런데 일단 그들과 나는 나이차이가 적게는 5살에서 많이는 스무살도 났다. 그럼 물론 보고 자란 드라마도 다른게 맞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들만의 회의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공부해야 했고 무슨 대입을 앞둔 수험생처럼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보기만 해서는 남는 것이 없다. 말로 다다다다 나올 수 있어야 했다. 보는 동시에 분석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했다. 인물 캐릭터들은 어떤지, 캐릭터에 따라 대사나 상황을 어떻게 다르게 풀었는지. 16회 동안 극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가 되었는지. 갈등을 증폭시키는 매개로 무엇을 사용했고 또 어떻게 해결되는지.

로맨스는 어떤 점에서 시청자를 설레게 할 수 있었는지! 

장면 하나하나가 나에겐 분석 대상이었고 모든 것이 회의 때 써먹을 무기처럼 보였다. 



A를 얘기하면 A'가 튀어나오고 B를 얘기하면 C, D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치를 쌓기 위해 매진했다. 뛰어난 기획PD가 되기 위한게 아니었다. 그저 그정도 되어야 대화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다들 저 정도를 했으니까. 

흔히들 하는 말처럼 수능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 갈 수 있었을 거다. 마치 오답노트처럼 내 취향이 아닌 드라마라면 왜 자극되지 않았는지, 어떤 면에서 재미가 없었는지도 분석해가며 열공했으니까.

기획 PD라는 직함을 달고나서의 드라마 시청은 이렇듯 비장하고 치열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 간사하지.

분명 일로 하는 게 아니었을 땐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드라마를 보는 것이 가장 즐거운 휴식 방법이었다. 한 드라마에 꽂히면 그 작가가 썼던 다른 드라마도 찾아보고. 장르도 가리지 않고 국적도 가리지 않고 재밌다는 추천을 보면 10년 전 드라마를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상황은 달라졌고 내 마음 가짐도 변해갔다. 

그때의 내 생활은 그야말로 드라마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일단 회사에서도 시간이 나면 드라마를 보고 출퇴근 시간,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도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봤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도,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도 드라마를 비롯해 일에 도움이 될만한 콘텐츠들을 봐야 했다. 이렇게 내 모든 생활이 드라마를 중심으로 흘러갔는데 그럼에도 시간은 부족해서 늘 애가 탔다.



점점 드라마를 보며 쉬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드라마를 보는 행위 자체가 피곤했고 스트레스였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나 책도 멀어지고만 싶었다. 

이걸 봐야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강박이 점점 커지고 나를 짓눌렀으니까...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것들이 일을 위해 습득해야만 하는 '지식백과'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나를 자책했다. 나름 드라마 덕후라고 자부했는데 아니었구나.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졌으면서 이 정도도 감당을 못하다니. 어렸던 나는 모두 내 잘못인 것만 같아 괴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너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는 게 아니었다고.

돈벌이가 되는 순간 가져야 하는 책임을 비롯해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분명 '덕업일치'로 성공한 사람도 많고 만족을 표하는 분들 또한 많겠지만...

모든 '덕업일치'가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 나는 이 일을 그만두고 지금의 회사로 이직할 때까지 쉬었던 6개월간, 드라마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둘 때 드라마 역시 너무나 쉬고 싶었기에.

그땐 드라마에 질릴 대로 질렸었고 업계 자체를 환멸 할 정도였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드라마를 보지 않을 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아예 업계를 떠나 다른 직업을 갖게 되자 드라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석하지 않고, 누가 대본을 썼고 누가 연출하는지 따지지 않으면서 보는 드라마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발을 뺀지 몇년이 흐른 지금은 나도 점심 시간에 동료들과 드라마 이야기를 꽃피운다. 

"어제 그 드라마 봤어?" 

"남주 너무 잘생겼지. 어제 설레 죽는 줄 알았어."와 같은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드라마는 역시 하루 일과를 끝내고 야식 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게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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