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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Feb 19. 2019

내 꿈과 열정은 100만 원  

너무 당연했던 열정페이 



합격통보를 받았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합격 연락을 기다리면서 오리구이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고, 낯선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떠올랐을 때 얼마나 가슴이 쿵쾅거렸는지... 

합격 소식을 듣고 "고맙습니다."를 몇 번이나 외쳤고, 그날 오리구이집에서 취할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나 기뻤다.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행복했다. 





나는 순수했던 걸까 멍청했던 걸까

첫 출근하던 날인가. 팀장에게 6개월간의 수습기간과 100만 원의 월급을 듣고 적잖게 당황했다.

물론 100만 원의 가치를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의 4년제 대학을 나와서 1200만 원의 연봉을 받는 경우는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게다가 수습기간이 3개월도 아니고 6개월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깐, 좋다고 웃었다. 당연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인데  월급이 너무 적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우리 아버지는 요즘 같은 세상에 말이 되냐고 화를 내셨지만, 딸이 좋다고 헬렐레하니까 한숨과 함께 잘 버텨보라고 하셨다. 물론 나도 내가 이러려고 학비 들여가며 대학을 다녔나... 자괴감은 들었다. 

그러나 당시, (지금도 크게 다를지는 모르겠다.) 방송판은 학력 인플레가 워낙 심한 곳이었고 대우는 열악했다. 다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열정 페이'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열정 페이를 강요당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낮은 임금을 받더라도 해야 하는 게 청춘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듯한 어른들 틈에서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멋있는 일이니. 월급이 적다고? 그럼 나가. 너 말고도 할 사람은 많아.

이 말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 일이 너무 하고 싶은 사람들의 꿈과 열정이 누군가에겐 먹잇감일 뿐인 곳이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에 일조하는지도 모르고 출근하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강남에 있는 회사로 출근을 하며 어쩐지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베테랑인 감독, 작가와 함께 하는 회의시간에 수줍게 한마디 의견을 내보는 것도 그렇게 긴장되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내가 던진 아이디어가 대본에 반영된 걸 보면, '나 정말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 됐구나.' 벅차올랐다. 

그거면 됐지. 뭘 더 바래. 월급이야 몇 년 뒤면 많이 오르겠지! 더 열심히 하자 꾀부리지 말고.

그런 마음으로 부당한 대우에 대해 화를 내는 대신 나를 채찍질했다. 






내가 다녔던 제작사의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간혹 출근이 10시라고 하면, 좋겠다! 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이게 뭘 의미하는 모르는 사람이 부럽다. 참고로 나는 이직할 때 출근시간이 10시인 곳은 보지도 않고 걸렀다.

출근이 늦다는 말은 퇴근이 늦다는 말과 같으니까.



퇴근 시간은 18시 30분이었지만 지키라고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냥 일단 퇴근 시간이 필요하니 만들어 놓았달까. 물론 이는 회사의 기획팀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마케팅이나 경영팀의 경우는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이상하게 오로지 기획팀만 야근과 주말출근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나는 강제 프로 야근러가 되어야 했을까? 



기획 PD의 가장 갑은 사실 '대본님'이다. 

나의 모든 스케줄을 쥐고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대본에 의해 야근하고 대본에 의한 주말 업무가 있었다. 

대본의 수정이 시급하단 판단이 되면 주말이어도 예외 없이 출근해야 했다. 특히 방송국 편성회의에 대본을 제출해야 하는 시기가 되면, 대본이 나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모니터링을 해야 했다. 물론 작가들이 제작사 직원들의 업무시간까지 고려하면서 대본을 주지 않기 때문에 새벽까지 대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날, 퇴근을 일찍 하는 것도 아니기에 막상 대본이 나왔을 때 꿈나라로 가는 경우들도 있었다. 


 

우리야 '꼬박 20시간을 넘게 일하는데 당연한 거 아냐?' 해도 팀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팀원 중 한 명 정도 그렇게 골아떨어진다고 모니터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메신저에 폭풍 메시지를 남겨 우리의 사기를 지하 끝까지 떨어트렸다. 


-

책임감이 얼마나 없으면 잘 수가 있어.
이러니 내가 너희한테 어떻게 일을 믿고 맡기니?

-


무척 순화하여 썼지만 그녀는 때때로 초등학생을 혼내는 선생님처럼 다 큰 어른들을 혼내곤 했다. 엄청난 책임감으로 무장하지 않고서야 100만 원 남짓한 월급을 받으면서 할 짓이 아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내 꿈과 열정으로 빚어내는 노동의 가치가 100만 원으로 후려치기 당하는 것이 괴로웠지만 

아마 회사는 100만 원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계속 더, 더, 더 많은 것들을 요구했으니까. 



나도 열정 페이 피해자 (출처: 내 지갑, 현금이 이것뿐이라...)



우리 일은 24시간 생각해야 해.

한 번은 팀장이 나와 팀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24시간 일을 생각하라고... 본인도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그러라 했다.

그때의 나는 저 말을, 내가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고민했다. 내 삶의 100%를 쏟아부으라는 말인데 당연히,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들과도 시간을 보내고 싶고 남자 친구와도 데이트하고 싶은데 그러면 안된다는 말인가. 

분명 처음엔 화가 났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내가 프로답지 못하고 아마추어인 건지 헷갈렸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 말은 꽤 효과적이었다. 그때의 나는 일 욕심이 많은 편이었고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이리저리 구르며 어느새 24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삶의 대부분을 일에 쏟아붓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얼 위해 일하고 있는지 돌아볼 여력도 없이 스물다섯의 꿈으로 반짝이던 나는 점점 시들어 갔다. 밤늦게 퇴근해서 혼자 맥주 한 캔을 따는 일이 잦아졌고, 새벽 3-4시까지 잠들지 못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유 없이 울게 되는 날이 많았다.



왜 더 빨리 그 말이 개소리였음을 깨닫지 못했던 걸까.

지금 와서 못내 아쉽다. 

내 꿈과 열정을 먹어치운 님들,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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