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신앙 반항기
아이들이 교회에 가지 못한지 벌써 몇 달째다.
우리 집 어린이는 교회 선생님을 교회에서보다 선생님네 꽃 가게나 시장에서 더 자주 마주치고 있다. 거주지가 다른데도 서로 활동 반경이 겹치는 것도 신기한데, 교회 선생님을 교회 밖에서 더 보게 되는 것도 또한 생각할수록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 방침이 완화되면서 인원 제한이 있는 예배로 전환된 그 주였다.
그 주엔 이번 달에 생일인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해 줬던 것 같다. 오프라인 예배를 가지도 않았고, 몸이 아프다고 늦잠을 자느라 온라인 예배를 보여주지도 않아서 몰랐다.
"아, 오늘 친구들 생일 축하해 줬구나." 뒤늦게 단톡방의 밀린 채팅을 내려보다가 손이 멈췄다.
오늘 축하에서 이름이 빠진 아이의 가정이 남긴 채팅이었다.
우리 아이 이름이 빠졌더라며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자, 여기서 질문.
이 맥락에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는 어떤 의미일까.
1. 아이가 슬퍼합니다.
2.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기도해 주세요.
3. 신경 좀 써주세요.
4. 뭐 그렇습니다.
5. ( )
한동안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으로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들과 같은 세계관으로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가슴에 들어앉은 한이 풀릴 때까지 글을 써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댓글이 달렸다.
동문회에서 성명을 냈는데, 그걸 보며 참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사건이 발생한 직후, 그러니까 정인이라는 한 어린이가 그렇게 사망한 직후 아주 잠깐 언론의 주목을 받은 때가 있었다. 한0대 졸업생인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그때 동문들은 알고 있었다고 했다. 다들 충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했다는 말도 함께 들었다.
내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 친구는 아직도 슬퍼하며, 아들 둘을 거칠게 키우는 자신도 학대를 하는 것이 아닐까 매일 자신을 검열하며 하루하루를 이어가고있다.
문득 동문회에서 내놓았다는 성명이 궁금했다.
찾아보니 공식은 아닌 것 같고, 졸업생 누군가의 sns에 올라온 글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중에 있던 이들.
우리 안에 있는 거짓과 위선.
내 안에 있는 모습을 보며 잔잔히 읽어 내려다가 또다시 어느 지점에서 눈길이 멈췄다.
희생하며 섬기고 살겠다는 다짐이었다고.
본인들이 다르거나 특별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그랬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교육받은 인재를 양성해,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섬김의 자손들을 키워내겠다는 큰 포부가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포항 어딘가에 기독교 대학이 생겼는데 서울에서도 최상위권 대학에 갈 수재들이 장학금까지 포기하고 한동대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한동안 한국 교회 안에 엄청난 화제거리였다. 그 "믿음의 오빠들"의 선택의 결과로,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즈음 그 학교와 관련해 교회 안에 돌던 소문은 한0대 출신이면 kbs에서 면접도 보지 않고 뽑아 간다는 것들이었다. 신앙을 선택하면 이렇게 인생길이 열리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 뒤따라 오는 레퍼토리였다.
문득 유치부 단독방에서 읽은 그 한 문장이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기독교의 교육은 적어도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시키기엔 부적합하다는 생각도 더해졌다.
광주인가 어디에 있는 선교 집단에서 코로나 전국구 집단감염이 발생했다는 뉴스로 떠들썩하던 즈음이었다.
그날도 엄마는 내게 이상한 사이비들이 많아서 교회가 욕을 먹는다며 걱정을 한가득 늘어놓으셨다.
"엄마. 상주에 그 선교사 모임은 인터0이고, 광주에 그 기독교 국제 학교인지 뭔지는 선교를 빙자한 유학원이던데?"
인터0.
지금은 주류 기독교 교단들이 교류를 금지하고 있다는 말이 있던데, 인터0은 전 세계 최전방에서 미전도종족 선교에 앞장서는 단체이다. 최전방이라는 표현을 내가 쓰고도 뭔가 웃기기도 한데,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정말 목숨 내걸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당연히 극 보수 주의적이다.
그, 선교한다는 국제 학교.
처음엔 여기의 대표인 선교사가 백0 출신이라길래 그곳에서 신학을 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학력과 안수에 관한 풍문들을 따라가보면, 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제는 기독교 발 코로나 집단감염이 발생할 때마다 "거긴 어딘데?"라고 묻는 남편에게 교단별 특징을 설명해 주기도 지쳤다.
차라리 고0이나 인터0이면 설명이나 쉽다.
그 비인가 국제 학교에서는 나도 할 말을 잃었다. 그저 남편에게, 정말 빠르고 쉽게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혹시 감투 하나 필요하면 어디든 자리를 만들어봐 줄 수 있다는 헛소리나 할 뿐이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한 유명 디자이너는, 전쟁 직후에 아버지께서 교적부가 불타버렸을 뿐이라며 학교에 박박 우겨 명문대 졸업장을 얻었다던가. 실제로 그런 게 가능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강 같은 거 좀 듣다가 사람들 앞에서 연극도 잘 하고 웅변도 잘 하고 목청도 좋으면 부흥강사로 이름을 떨치고, 그렇게 여차저차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될 수 있었다. 교육부에 의해 인가받은 신학대학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잘 모르기에 더욱 가능했을 것이다.
사이비들 때문에 정상적인 교회들이 욕을 먹는다는 엄마의 말에 또다시 와 다다다 말포탄을 쏟아냈다.
그런 비인가 "국제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는 어떤 생각일 것 같냐고. 믿음 안에서 세계적인 인재로 키우는 아주 훌륭한 교육을 시키겠다는 꿈 아니었겠냐고. 한국교회와 성도가 그토록 열광하는 국제 세계 중심 제일.
강대상에서 한 판의 쇼를 잘 하는 목회자의 설교가 은혜롭다며 몰려드는 성도들은 무슨 심리일 것 같냐고.
개신교와 천주교의 뿌리가 같은데, 어떻게 우리 개신교는 신학을 속성과정으로 할 수 있느냐고.
사제 후보생들은 할 짓이 없어서 그 젊고 예쁜 나이에 그렇게 힘들게 교육을 받느냐고.
우리 교단에서 목사 안수 받겠다고 신대원 입시에 몇 수까지 하는 목회 후보생들은 뭐 학위 하나 따려고 그렇게 하는 거냐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믿음 안에서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믿음의 자녀를 키우는 것" 따위의 이런 북한스러운 말투는 대체 왜 모든 교회에서 다 쓰는 거냐고.
정인이 양부모의 동문이 희생하고 섬기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지 특별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말을 하더라고.
자기들이 뭔데 희생하고 섬긴다는 말을 하느냐고.
세상은 우리에게 희생과 섬김을 바라지 않는데, 그저 미안하고 미안하다는 그 진심의 한마디와 통렬한 반성이면 되는 건데 왜 꼭 희생하고 섬기겠다 하느냐고.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건, 그냥 모여서 사고만 치지 말고 남들처럼 사람답게 살라는 것 뿐이라고.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렇게 폭풍이 한차례 지나고 나면 감정과 정신도 정리가 된다.
문득, 교회 안에서 "낮은 자세로 섬기고 희생하-"겠다는 말이 일종의 꾸밈말처럼 쓰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반성을 해야 하거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볼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으로, 마치 "6.25는 남침"처럼 머릿속에 자동 공식처럼 입력된 것 말이다. 자동 입력된 내용이라 그 이상의 다른 표현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더 표현할 방법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니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그 "기도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이 의미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섬기며 그분의 빛을 나타내는 소금의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이, 도저히 세상 사람들이 못 알아들을 자기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 아이러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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