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11시부터 새벽 4시까지만 멈추는 메트로놈이었고, 면도날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스케줄로 하루를 쌓는 것이었다. 명상으로 시작해 독서와 글쓰기, 규칙적인 산책, 대학 강의와 강연 준비, 추리고 추린 지음과의 만남.
그는 나이를 더하지않고 남은 수명에서 빼는 젠가 게임을 즐기는 듯 했다.
그 탑의 높이는 작고하신 그의 아버지 나이라고 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지만 신중하고 최선을 다해 숨 하나씩을 빼나가는 것이었다.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을 돌아보고 한 달을 준비해 일년을 채우는 식이다.
나는 늘 경외심 비슷한 걸 품고 그를 대한다. 그의 소망은 후회가 남지 않을 책 한 권을 남기는 것이다. 이미 전공관련한 책 몇 권을 썼지만 자신의 모든 걸 담은 책, 진짜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한 지 한 5년쯤 지났으니 이제 10년 정도 남았을 것이다. 역작이 나오기까지 15년이 걸린다는 것도 그가 여러 작가들을 분석해서 내린 결론이다.
"저는 안그러려구요. 그냥 그날 그날 써내려가는거죠. 되돌아서 금방 후회할 말도 참지 않으려구요. 제 역량을 아니까... 그렇게 싸지르다 괜찮은 글 하나 걸리면 좋은 거고.... 작가는 안하고, 못될거니까"
태어난 곳도, 부모와 환경도, 전공과 성격까지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는 친구인데 남들이 의아해할만큼 가깝게 지낸다.
하물며 하루를 보내는 것조차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조울증 환자처럼 버거운 일정과 몰입으로 탈진해 있다가 별다를 게 없는 내일을 백수로 느릿하게 보내길 반복한다.
가끔은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진 이란성 쌍생아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모래 폭풍 속에서도 용케 길을 잃지 않고 사막 어디 쯤에서 어른이 되어 만났다. 어릴적부터 간직한 반으로 쪼갠 팬던트 조각을 맞춰보고서야 형제임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를 그곳으로 이끈 힘의 정체를, 먼 데서부터 더듬어 하나가 되는 생각의 우연성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썰물에도 잔잔한 격랑이 치기 마련이다.
최근 그의 호수같은 일상에 돌 하나가 물수제비를 뜬다. 몇 번을 튕기다 가라앉을지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마침내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간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다지만 철통같이 지키는 그의 루틴은 나로 인해 자주 깨진다. 권하지 않는데 만나면, 이야기하다보면 술이 당기는지도 모른다.
너무 아쉽지도, 넘치지도 않게 따른 그의 술잔처럼 천천히 우리의 시간이 다하는 그날까지 조금씩 나눠 마시면 좋겠다.
노을을 좋아하기로 작정했다. 여명이나 노을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둠이 새벽을 밝히듯 노을은 내일을 잉태한다. 황혼은 새벽을 닮았다. 그 새벽이 새로운 날을 열어주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 진짜 삶은 영웅적이거나 기상천외하지 않다. 삶은 아주 세속적이고, 별나지 않은 일상 속에서 욕구를 느끼거나 해소하는 식으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일단 버텨야 한다. 느려지지 않도록, 지워지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앞으로 수십 년은 끄덕없을 것처럼, 계속 예측하고 미래에 자신을 투사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운명을 만들기 위해 우연을 선택으로 바꾸는 일이다." <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 파스칼 브뤼크네르 中에서>
나른하고 느긋한 오후를 보내는 것도 능력이다. 게으른 아침으로 시작했지만 차분하게 황혼을 맞이하려 한다. 이 무심한 한가로움이야말로 아직 살 날이 창창한 젊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