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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r 05. 2023

살며 사치하며

"음... 먼저 말씀드린 가격, 그대로 쳐드리겠습니다. 흠집도 없어서, 딱히 감액할만한 건 없네요" 한참동안 차 안팎을 꼼꼼히 살펴보던 직원이 했던 말이다. 당시 8년째 접어들던 차였지만 좋은 값을 받았다.


Audi Q5. 수년 전 차를 처분한 건 꼭히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를 좋아하지만 운전은 질색하는 나였다. 한 집에 차 두 대가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대중 교통의 이점을 누구보다 잘 누릴 것 같았다.

발바닥으로 땅의 감촉이 느껴지는 게 좋았고 세상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은 그 무엇에 비길 수 없었다.

자신과 친해지고 자신을 잘 아는 것만큼 살아가는데 유효한 게 또 있을까 싶다.


프라이드로 시작해 스포티지, 마티즈, 체로키 4.7, 스파크, 아우디 Q5, 코란도 Sports까지 나의 자동차 여정은 내 삶처럼 들쑥날쑥 제멋대로 아니 제 멋에 겨워 널을 뛰었다.

마티즈가 인수까지 가장 오래 걸렸는데 이유는 한번도 주문받아 보지 않은 사양이어서 공장생산이 늦어진 탓이었다. 6개인가 8개인가 풀 에어백에 최고사양을 주문했다. "그럴거면 차라리 아반테 상급을...." "아니 이거...."  

나는 일단 차종을 선택하면 언제든 제품 카다로그 최상단에 있는 사양을 선택한다.  온갖 옵션을 걸어놓고 잔꾀를 부리는 한국식 마켓팅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문 앞에 택배상자가 놓여있다. 아들 이름인데 LP판이다.

최근 아들 녀석은 졸업 선물로 올인원 모델의 턴테이블을 선물받은 이후로 LP음악에 심취했다.

"아빠는 LP판은 왜 안모으세요?" 며칠 전, 아들이 물었다.

"제대로 들으려면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도 필요하잖아"

"그럼 아빠가 갖고 계신 진공관 라디오들은요?"

"비싼 오디오를 갖추고는 못들으니 진공관 라디오로 FM 음악 들으려고...."

"저건 안비싸요? 언제 건데요?"

"좋은 오디오 제대로 갖추는 것보단 싸지. 물론 많이 비싼 것도 있긴 하지만 해외경매로 싸게 샀어. 대부분 1940~50년대 것들이야"

그럴 심산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들의 LP판 충동질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아빠가 LP와 진공관 오디오에 미치면 집안 살림 거덜 나' 속으로 웃었다.


사치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사치는 즐기는 것이다. 들인 비용 이상을 거둬 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지키며 제대로 사치를 누리며 살고 싶다.

그러고보면 내 삶은 사치와 검약의 롤러코스트다. '2벌에 10,000원'이란 P.O.P에 현혹돼서 본래 염두에 뒀던 바지 대신 구입해서 입고 다닌다. 반면 마음에 쏙 드는 기백만원 이태리제 가죽 점퍼를 사느라 카드로 장기할부를 긁는 식이다.


만년필을 좋아하고 제법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다. 두어개는 한정판 명품이다.

그런데 한번도 잉크를 채워 쓰지않은 것은 없다. 그 또한 사치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괜히 긁적여 뭐라도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고, 같은 값이면 멋드러진 필체로 쓰고 싶어지게 만든다.


어제는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요즘 들어 자주 있는 일이다. 애써 다시 잠을 청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다가 만년필 광고에 꽂혔다. 한번도 눈여겨보지 않던 중국제 만년필까지 기웃거리게 됐다. 돌아보면 내가 써 본 최초의 만년필이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쓰시던 후드 닙의 중국제 '영웅(英雄)'이었다.


이런 걸 '지름신이 강림하셨다.'라고 하던데 직구사이트에서 폭풍 쇼핑을 했다.  개당 500원~ 27,000원이니 5개를 사고 아예 유리케이스까지 구매했다. 지금 쓰고 있는 케이스는 페레로로쉐 초콜릿 투명아크릴 박스를 활용한 것이다. 검색하는 동안 그렇게 마음이 풍족할 수 없었다. 한달 아니 두달이 걸려 도착하면 어떠랴.


때로는 사치가 삶의 가치를 올려주기도 한다. 사각대는 소리, 육중하게도 착 감기기도 하는 그립, 미끄러지듯 흐르고 삐치는 펜촉의 스케이팅, 무르기도 단단하게도 달리 전해지는 펜 촉의 느낌, 금장과 스틸에 새겨진 음각의 아름다움.

세계적인 명품이 아니면 또 어떠랴. 제품 카피라면 세계 제일의 수준에 이른 중국제가 아닌가. 야릇한 흥분과 기대감으로 한동안 지낼 수 있겠다.


"정신은 필요한 것을 획득할 때보다 필요 이상의 것을 획득할 때 한층 더 흥분한다. 인간은 욕구(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바람)의 창조물이 아니라 욕망(삶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을 바람)의 창조물 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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