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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May 16. 2024

표류

'경로의존성'은 스탠퍼드 대학의 폴 데이비드와 브라이언 아서 교수가 주창한 개념으로, 한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을 뜻한다.

가장 비근한 예로 불편하기 그지없는 영문  쿼티(QWERTY)자판과 효율성과 한글의 아름다움이나 창제 원리에 가깝게 고안됐음에도 두벌식에 밀려난 세벌 타자기를 들 수 있다.


'일정한 경로', '비효율', '경향성'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작금의 시대 상황과 유사해서다. 오래전부터 몰락을 자처한 언론에 가속도를 붙이고 방송에도 재갈을 물리는 현 정권과 그 대척점에서 레지스탕스적 활동을 펼치는 소위 진보진영 스피커들의 격돌이 그러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의도적 경로', '불합리(몰이성)', '경직성'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경로의존성'에 빠지게 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조선일보과 TV조선, 수구기득권의 첨병인 종편만 시청하는 국민은 현 정권의 부정부패와 난맥상을 알지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반면 뉴스공장이나 매불쇼,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유튜브 방송 애청자는 조중동과 종편 보도를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다.

21세기임에도 현 정권은 정보와 보도, 기사가 그들이 파고있는 고랑으로만 흐르게끔 유도하고, 반대측에서는 그렇게 틀어막은 둑을 허물어 새로운 물길을 내는데 주력한다.


이들의 우려되는 공통점은 정보와 뉴스의 '경로의존성'을 높여 지지자들을 맹목적 신도화하는데 있다.  

수구 언론은 권력에 굴종하고 광고주와 사주의 명을 받든다. 물론 진보 언론을 참칭하는 함량미달의 일부 유튜버들 역시 음모론과 선정적인 보도 거기에 갖은 요설을 섞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시선이 금고와 헌금함 그 중 어디에 꽂혀있는지가 다를 뿐이다.


혼탁하고 어지럽기까지 한 세상이다. 구부려지고 비틀린 정의, 일부만 보여주는 진실과 부풀려진 사실이 미세먼지처럼 뿌옇기만 한데 누군가의 발 뒷꿈치나 이미 난 길만 쫓는다면 청맹과니가 되기 십상이다.


'복원 탄력성'은 본디 없던 단어의 조합은 아니되 내가 생각해 낸 말이다. 잰 척하지만 나 역시 수많은 오판과 실수를 거듭했다. 누구든 정치적 사안, 경제적 관점, 문화적 현상, 시사적 사건을 언데나 완벽하고 올바르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개개인의 격차나 확률은 존재하고 이것이 신뢰와 존중의 척도가 된다. 그 차이를 만드는 요소가 '복원 탄력성'이 아닐까 싶다.


억압당하고 조작된 환경, 왜곡된 정보와 편향된 지식에 의해 비틀리고 꺾여진 인식이나 판단을 바로 잡는 힘이 복원력이고, 경직되지 않는 폭넓은 이해와 유연한 사고가 곧 탄력이다. 그것이 곧 '복원 탄력성'인 것이다.

그저 변형된 채 그대로인 가소성과 지금껏 달려온 관성에만 떠밀리면 아무런 진전도 의미도 없이 말라 비틀어진 쭉정이로 살다 가는 수밖에 없다.


'복원탄력성'은 한번 더 생각하고 깊이 들여다 보는데서 생기는 일종의 면역력이다. <최강야구>의 김성근 감독과 손흥민을 키운 손웅정이 공통적으로 그리고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생각하라'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은 고되고 반복된 훈련에 지친 프로지망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을 던지면서 (혹은 배트를 휘두르면서) 생각 없이 던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손웅정은 "축구를 할 때도 생각해, 생각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상상하라고 얘기한다." 고 했다.


흔히 급변하는 미래의 파고에 표류하지 않으려면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고 한다. 통찰력은 사색으로 호흡하는데서 나오고 사색은 생각하는 힘이다.

생각의 힘, 유한한 생에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깊은 탐색을 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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