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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용성 Jan 18. 2020

녹음실을 나온 까닭

정규 앨범을 내고 싶었다. 곡도 돈도 없었다. 기술을 익히면 음악과 생활 모두에 보탬이 될 거라 생각했다.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다. 다다음날 전화가 왔다. 수습기간은 3개월, 수습 급여는 50만 원. 다음 주부터 나가기로 했다. 2012년 8월 27일 첫 출근을 했다.


8개월간 일했다. 개중에는 오래 있던 편이었다. 녹음실에 자주 오던 K형은 일부러 내 이름을 외우지 않았다. 자신이 이름을 외울 때쯤이면 애들이 그만둔다는 이유였다. 그는 녹음실에 올 때마다, 아직도 있냐며 장난처럼 묻곤 했다. 그가 내 이름을 외운 후에도 오랫동안 일을 했다.


크레딧에는 어시스턴트 엔지니어로 기록되곤 했지만 내겐 아무 기술도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은 프로툴 조작 ― 녹음 버튼, 키패드의 3번을 누르는 것 ― 밖에 없었다. 음반 산업의 톱니로서 나는, 오류 없는 오디오 데이터를 규격에 맞춰 생성해내면 될 뿐이었다.


좋은 곡을 녹음할 땐 아무래도 좋았다. 수준 연주를 듣는 재미가 있었다. 새로운 음악을 듣는 재미가 있었다.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팔-구 할의 그저 그런 노래, 때로는 노래도 아닌 뭔가를 녹음하며 나는 항상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오퍼레이터에서 엔지니어로 올라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감각과 지식 모두 부족했다. 그것들을 쌓을 힘과 시간 또한 부족했다. 평일, 주말 구분 없이 낮 11시에 출근하고 밤 11시에 퇴근했다. 일상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일상이 사라지니 정상적인 마음가짐으로 무엇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겉돌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내가 다니던 녹음실은 오래된 음악공동체(혹은 레이블)이기도 했다. 회사에는 녹음실 일을 하는 ― 소위 기술부 ― 라고 불리던 사람들과, 아티스트들이 있었다. 나는 녹음실에는 소속되어 있었지만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 대부분 연상인 ―  아티스트 모두가 나를 잘 챙겨주고 편하게 대해줬지만, 끝끝내 소속감을 갖지 못했다.


임금이 적은 것은 괜찮았다. 사장님도 돈을 별로 벌지 못했으니까. 그 정도가 사장님에게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대신, 적은 임금을 상쇄할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성장'이나 '보람', '소속감' 같은 것들. 결국엔 셋 중 하나도 갖지 못했다.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해가 바뀔 때쯤, 잃어버린 일상이 눈에 밟혔다.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은 엔지니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괜찮은 엔지니어가 된다고 해서, 잃어버렸던 일상과 관계를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괜찮은 엔지니어가 되려면 자신이 기댈 일상과 관계를 녹음실 안에서 새로 구축해야 했다.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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