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두 번 제 딴엔 꽤 호사스러운 산책을 나섭니다. 무려, 궁궐산책입니다. 창경궁을 들어서서 창덕궁 연결문을 지나 종묘까지 허적허적 돌아다닙니다. 이유는 다분히 자본주의스럽습니다. 설날과 추석연휴에는 입장권이 공짜거든요. 세 곳의 입장권을 합쳐봤자 오천 원을 조금 넘을 듯한데, 그게 뭐라고 이리 챙깁니다. 엠자탈모가 심해지는 게 공짜심보 탓일 수도 있겠지만, 괜찮습니다. 머리 밀고 다닌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날에는 애써 뭔가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차분한 관람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일 년 중 가장 많은 방문객을 치를 겁니다. 형형색색의 젊은 한복무리와 유모차 끌고 온 가족들, 연휴 맞추어 찾은 관광객들로 궁궐마다 북적입니다. 그래서, 보기보다는 걷는 데 집중합니다. 한 곳에 모여있는 세 궁궐을 제집 드나들듯 나다니는 게 호사의 컨셉이라면 컨셉입니다. 먼저, 창경궁에 들어선 후 오른쪽으로 꺾어 연못을 한 바퀴 돌아 창덕궁으로 연결되는 문을 지납니다. 이곳에선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종묘로 향합니다. 얼마 전부터, 창덕궁과 종묘 사이의 터널 위를 연결하는 길이 생겼습니다.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한적하니 걷기 좋습니다. 터널 위의 길을 지나 돌담길을 따라 걷다 종묘로 들어섭니다. 한 바퀴 휘이 둘러보고 광장시장 혹은 세운상가 쪽으로 향하는 게 코스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깜박할 뻔했습니다. 사찰 기웃거리는 재미에 빠져서인지, 때늦은 ‘재벌집 막내아들’에 빠져서인지, 이 중한 연례행사가 연휴마지막날 아침에야 떠오른 겁니다. 무료입장인지 급하게 검색해 보니, 다행히 가능하다 합니다. 하지만, 막상 나가려니 망설임이 앞섭니다. 한파가 극성이라고 하더군요. 오전 8시쯤이었는데도 영하 15도였습니다. 한낮에도 오르지 않을 거라고, 일기예보는 알려주었습니다. 갈까 말까 잠깐 망설이다, 그래도 가보기로 했습니다. 커피를 진하게 내려 보온병에 옮겨 담고, 옷장에서 제일 두꺼운 옷들로 골라 입었습니다. 핫팩도 흔들어 주머니에 넣고, 에베레스트산 오를 옷차림새와 마음가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춥긴 추운가 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이리 휑한 궁궐은 또 처음이었습니다. 악천후 산책에는 이런 혜택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주인장인 듯 가슴 쫙 펴고 걸었습니다. 사람이 많을 땐 앞만 보고 다녔는데, 사람이 없으니 시선이 자연스레 하늘로 향했습니다. 꽤 여러 번 왔던 곳인지라 익숙할 만도 한데, 시선이 살짝 달라지니 생경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날, 제 눈에 띈 것은 바로 ‘어처구니’였습니다.
숙정문의 어처구니
궁궐이나 나라의 대문 처마 위에 나란히 줄 서 있는 흙인형들을 한 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그걸 ‘어처구니’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상상밖의 큰 사람이나 물건’을 어처구니라 합니다. 궁을 지키기 위해 상상밖의 크고 강한 ‘수호신’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올린 것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어처구니 맛집을 꼽으라 한다면, 환구단의 중심건물인 환궁우를 추천합니다. 이곳에는 층층마다 여럿 어처구니가 지키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은 어처구니를 보면서, 뭔가 중한 게 모셔져 있구나 싶었습니다. 표지판을 읽어보니, 태조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고 하네요. 뭔가 꽤 오버스러우면서도, 멋들어져 보였습니다.
환구단, 환궁우
환궁우의 어처구니
‘어처구니없다’는 말의 어원도 바로 이 어처구니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궁궐이나 나라의 대문 지붕에만 올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궐 짓는 장인들이 궁궐인 줄 깜박하고 어처구니를 올리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 지어진 집을 바라보다,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어딘가 비어 보이는데 싶다가, 퍼뜩 ‘어처구니가 없네’ 했던 게 어원이라는 얘기입니다.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어처구니’의 패턴은 단순합니다. 맨 앞에는 장군모양의 흙인형이 쩍벌을 하고 의자에 앉은 듯 근엄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다양한 해태 상 같은 동물상들이 줄을 지어 있구요, 마지막에는 용머리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의 줄세움에 정해진 개수는 없다고 합니다만, 장군상으로 시작하여 용머리로 끝나는 건 국룰인 듯합니다.
창덕궁 어느 처마에서 꽤 특이한 어처구니 라인을 만났습니다. 이 어처구니들은 앞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맨 앞의 장군상은 물론이거니와, 그 뒤에 있는 상들도 저마다 고개를 달리 빼들고 저마다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남의 등만 바라보지 말고, 제 보이는 대로 살라는 이름 없는 장인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문득, 궁궐이라는 게 세상 가장 화려하고 커다랗고 근엄한 '감옥'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높고 고귀할수록 제 맘대로 밖을 거닐기 어려웠겠지요. 그 옛날 누군가는 궁궐 밖이 그리 궁금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어처구니는 그들의 시선을 대신 바라봐주는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수평선 너머로 던지는 시선들을 가장 부러워한 건, 어쩌면 임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주에 역마가 있는 저로서는 이런 곳에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처마가 꼭 뱃머리 같기도 합니다. 빠르고 거센 세상의 흐름을 목도하며, 바다 닮은 하늘을 유유히 항해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