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즉흥의 연속. 즉, '흥'의 연속
[수줍은 표지 '없는' 산책]
레코드판에
한참 빠졌을 때가
십대 후반이었지 아마
용돈을 쪼개고 쪼개고
그래도 모자라면
없던 단과학원 수업과
참고서를 핑계로 꼬불쳐
한 장 두 장 모아둔 것이
삼십 년 후가 지난
내 방에 다시 들어차 있어
아들과 아내 덕이야
아들은 창고 안에 처박혀 있던
레코드판들이 궁금했던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물어봤겠지
"이거 어떻게 듣는 거예요?"
아들에게 낯선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아내는 잠깐 내가 떠올랐을 거야
물론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겠지
이걸 저 굼벵이에게 떠넘겨봤자
입으로만 알았다 하고 움직일 생각 없을 테니
스스로 이래저래 검색해서
턴테이블을 하나 주문한 거지
그래서
어느 날 이른 퇴근길
현관 앞에
난데없이
턴테이블이 등장한 거야
'비둘기'를 맞닥뜨린
'노엘*'처럼 놀랐어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톡으로 확인한 후
박스를 뜯고
매뉴얼을 보며
하나 둘 설치를 해보는데,
간만에 두근대더라
방 한 켠에 설치를 마치고
집에 있는 작은 스피커에 연결한 후
레코드판 한 장을
조심스레 닦아 올렸는데
뭐랄까
삼십 년 전과 지금이
다이렉트로 연결되었달까
기억은 가물거려도
감흥만큼은 선명하더라구
그렇게 옛 기분에 취해 듣고 있었는데
아들이 학원에서 돌아왔어
곧이어 아내도 퇴근을 했지
셋이 모여 앉아
이 앨범 저 앨범을
꺼내보고 틀어보며
한동안 서로 재잘댔어
간만에 들어보는
레코드판의
지직거림에
추억도 돋았지만
문득,
서로 모인 그 순간이
'기막힌 우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거야
어쩌다 만나고
어쩌다 태어나
어찌어찌 살아가는
어쩌면 가족은
각자의 리듬이
따로 또 같이
어우러지는
일종의 'Jam Session'일지도 몰라
대화란 대부분
즉흥적인 합주 같은 거잖아
누군가와 리듬을 맞춘다는 건
분명, 귀찮고 버거운 일이지만
혼잣말보다
혼자 부는 휘파람보다
흥이 날 수 있지
또,
합주가 있어야
애드립도 빛날 수 있으니까
불협화음은 삶의 강렬한 리프가 될 것이고
지직거림도 시간이 지나면 낭만이 될 테니
기왕이면
함께 흥겨웠으면 좋겠어
인생이란
즉흥의 연속이니까
즉, '흥'의 연속이니까
*노엘 :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 '비둘기'의 주인공 이름. 정치인 아들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