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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순 May 06. 2023

사이즈의 문제

[수줍은 표지 산책] 라흐마니노프 콘체르토 3번 D 단조

자켓에는

똑같은 사진 여섯 장이

너무도 정직하게 놓여 있다

이건 레이아웃도 뭣도 아니다

그냥 놓아둔 것이 맞다


처음엔 일종의 '틀린 그림 찾기'인 줄

뭔가 숨겨 놓은 게 분명해

왼쪽 어르신 목에 두른

스카프의 패턴이 달라보이는데...

하지만, 눈동자를 굴리며

몇 번을 봐도 같은 이미지이다


다년간 광고대행사 짠밥으로 미루어 볼 때

저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알 것 같다

'사이즈의 문제'였을 것이다


해상도가 너무 낮아서

자켓사이즈로 이미지를 키우면

업체 말로 '깨져서' 못 쓰는 사진일 것이다

아마도 앨범자켓으로 쓰기 위해

찍은 사진은 아닐 것이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가 만났을 때

기념으로 가볍게 찍어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저리 무책임한 디자인

할 수가 있나 싶었다

대부분의 아트 디렉터는

분명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쓸 수 있는 사이즈의 최대치를 가늠하고

나머지를 어찌 채울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카피를 크게 키워서 여백을 채울 수도 있고,

사진을 폴라로이드 프레임에 넣고

지휘자의 보면대 한쪽에 악보와 같이 놓아두는

'연출' 따위를 했을 수도 있다

'워홀'의 '몬로'까지는... 가지 말자


하지만, 그 모든 방법을 무시하고

누군가는 단순무식하게 밀어붙였다

확신하건대 저 디자인은

아트디렉터의 프레임을 벗어났다


그 상황과 표정, 미묘한 공기까지-

연출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이미지를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를 원했고

그 고집의 결과물이 이 앨범자켓일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사진'에

더할 이유가 없었을 게다


생각해 보니,

어떠한 장치를 조금이라도 더했다면

내 눈을 이리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앨범자켓도 광고도 결국

'어떻게 보여주느냐' 이전에

'무엇을 보여주느냐'의 싸움이다


눈길조차 못 끄는데

포커스가 어쩌고

아이컨택이 어쩌고

디테일이 어쩌고 무슨 상관이랴


내가 알고 있던

'완성도'란 얼마나 물렁한 것인가

뱃살 잡고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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