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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정 Feb 20. 2023

안녕, 아나

별이 된 너에게 


직장은 관뒀지만 매일 아침 컴퓨터 앞으로 출근을 한다. 컴퓨터 부팅 버튼을 누르고 습관적으로 인터넷을 열어 메일함을 뒤지고, 급한 메일에 답을 한 뒤 스팸 메일을 지운다. 그리고…그리고,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거나, 부랴부랴 급한 불을 잘 끄고 한 숨 돌릴 수 있을 때. 그때마다 나는 모니터 아래 잘 놔둔 초록색 카드 한 장을 꺼내 꼭꼭 씹듯이 한 줄 한 줄을 읽어 내려간다. 

초록색 바탕에 빨간 하트가 그려진 이 카드로 말할 것 같으면 작년 겨울 세상을 떠난 내 친구가, 무려 7년 전 뉴욕에서 보낸 애틋한 마음쯤 된다. 이 카드를 보내올 무렵, 나는 만삭의 임산부였고, 친구는 뉴욕 퀸즈의 어느 작은 월세 방에서 나름의 꿈을 키워갔다. 뱃속의 아기가 딸이라는 소식을 들은 친구는 핑크, 노랑, 레이스 일색의 바디 수트와 함께 양말, 레깅스 같은 선물을 잔뜩 보내왔는데, 그 앙증맞은 것들을 보내며 이 사랑스러운 카드를 동봉한 것이다. 

내 몸 상태는 어떤지, 아기 엄마가 되는 기분은 어떤지 여러 가지를 궁금해 하던 친구는 끝으로 언젠가 자기도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말을 카드에 적었다.

부처님처럼 귓 볼이 크고, 두터워 틀림없이 부자가 되리라 확신했던 그 친구는 그 후로부터 몇 년 뒤 뇌출혈로 쓰러졌다. 미국에서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건 6년 전, 수술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즐겁게 수다를 떤 건 4년전. 괜찮다기에 정말 괜찮은 줄 알고 '코로나 잠잠해지면 보자'는 매번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다 결국 진통제에 취해 자꾸 잠이 드는 친구만 두 번을 봤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은 결국 장례식장에서 이뤄졌다. 

그렇게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는 생활 곳곳에서 불쑥불쑥 나를 찾았다. 예컨대 찬장의 양념통이나 냉장고에 붙어 있는 레고 자석 등이 그렇다. 이것들은 모두 그 애가 뉴욕에서 보내온 선물들이다. 

초록색 카드는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함을 열어보다 발견했다. 친구가 직접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카드라고 생각하니 잉크의 번짐이나 사소한 점 같은 것에도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데, 잘 지내고 있지?란 글자 뒤에 씨익 웃고 있는 스마일 그림이 늘 마음에 위안과 평화를 준다.

사실 모니터 앞에서 많은 상처와 서늘함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업무상 카톡 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고, 이런 저런 요청을 뿌려 놓은 메일에 언제쯤 확답이 올까 늘 전전긍긍이다. 하루하루 날짜는 지나가는데, 진전된 일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느라 엄마, 아내 노릇은 뒷전이라는 미안함이 밀려올 때, 써둔 원고가 별로라는 자각이 들 때, 걸핏하면 체하는 몸 상태가 걱정이 될 때 그때마다 카드를 펼쳐 스마일을 찾게 되니 나는 친구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는 걸까. 

그 작은 스마일을 볼 때마다 다 괜찮다고, 지나간다고, 걱정 말라고 격려하던 친구의 푸근한 얼굴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른다. 처음엔 이 순간마다 울었는데,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은 혼잣말처럼 이런저런 말도 걸어본다. 그렇게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아픈 순간을 자각하고 인정하면서 나는 한 뼘 더 큰 어른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친구와 내가 붙어 다녔던 시간은 고작해야 고3때 1년 남짓이지만, 평생을 두고 이런 식의 잔잔한 위로와 가르침을 받게 될 거라 생각하니 그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멀리 떨어진 그 곳에서 지금쯤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유독 심성이 고운 그 친구는 어쩐지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빌며 부처님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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