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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정 Jan 04. 2022

나의 막돼먹은 영애저씨


누구에게나 가슴에 품고 사는 인생드라마가 한편씩 있다. 내 경우, 과거엔 <막돼먹은 영애씨>이고 지금은 <나의 아저씨>다. 장르를 따지자면 전자는 여기저기 코미디를 뿌려 넣은 시트콤이고 후자는 웃음기 싹 뺀 드라마인데 면면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짠내 폴폴 나는 서민들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최장수 시즌제 드라마로 막을 내린<막돼먹은 영애씨>에는 우리 주변에 꼭 있을 법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전단지며 현수막을 취급하는 작은 회사에 각기 다른 이유로 ‘진상’인 직원들이 모여 눈물겨운 고군분투를 이어간다. 탈모 걱정에 늘 빗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일명 ‘대머리 독수리 사장’, 식비 절감 차원에서 편의점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는 서현〮지원 부부, 헌옷 수거함에서 옷을 주워 입는 단벌신사 정지순에 ‘치맥’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77사이즈의 노처녀 ‘영애’까지. 그야말로 인물의 면면이 화려(?)하다.


주인공 영애의 식구들 역시 만만치가 않다. ‘이년 저년’을 기본 패시브로 장착한 기쎈 엄마에 그런 엄마에게 늘 기죽어 사는 아버지. 혼전 임신으로 남편과 나란히 친정 집에 얹혀사는 여동생을 비롯해 역시나 속도위반으로 갑분 애 아빠가 된 막냇동생까지. 웃을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환장 부르스의 스토리가 매회 펼쳐진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남녀노소 ‘광대역 진상’을 그렸다면 <나의 아저씨>에는 주로 불쌍한 ‘아재’가 등장한다. 딸의 결혼식에서 별거 중인 부인 몰래 축의금을 빼돌리다 걸리는 첫째, 부인의 외도를 눈치챈 뒤 혼자서 끙끙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둘째, 한때 촉망 받는 영화 감독이었으나 작품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형과 건물 청소를 시작한 셋째. 설상가상으로 조기 축구회나 술 외엔 인생에 별다른 낙이 없어 보이는 ‘한때 잘나갔던 동네 형들’까지 합세하면서 현실 싱크로율 100%를 자랑하는 ‘짠내 아재들’이 그려진다. 텍스트로 보자면 ‘이런 세상 불쌍한, 세상 한심한 사람들이 있나’ 싶지만 다행히 드라마는 좀 더 입체적으로 인물을 조명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연민, 나아가 애정을 불러일으킨다. 


<막돼먹은 영애씨>의 씬 스틸러 ‘대머리 독수리 사장’만 해도 그렇다. 회사에서는 영업 실적을 거론하며 직원들을 압박하는 꼰대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매일 밤 술잔을 기울이며 가족 사진을 들여다 보는 기러기 아빠다. <나의 아저씨>에 등장하는 맏형 ‘상훈’역시 딸의 축의금에 손을 대는 한심한 가장이지만, 22년 다닌 회사에서 잘린데다 두 번이나 장사를 말아 먹어 신용불량자가 됐다는 사정이 있다. 


이처럼 핑계 없는 무덤이 없고,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이 없을 테지만 문제는 드라마처럼 속속들이 남의 사정을 다 헤아려가며 사는 건 사실상 판타지에 가깝다는 점이다. 나 혼자 몸도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에 대관절 누구를 어떻게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시간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상당히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온도로만 서로를 대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오합지졸에 가까운 서민들이 등장해 지지고 볶는 한편, 알고 보면 이래서 저랬고, 저래서 이랬다는 이해를 주는 드라마는 더없이 소중하다. 비록 허구지만, 개연성 넘치는 두 드라마를 반복해 보다 보면 누군가를 미워하던 마음도 조금씩 옅어짐을 느낀다. ‘그래 어쩌면 그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었을지 몰라’ ‘내가 속속들이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하면서 미지의 긍정을 자꾸만 점쳐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세상만사에 통달한 성숙한 친구 하나가 ‘좋은 쪽으로 생각해라 임마!’ 하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느낌과 비슷해서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고, 긴장됐던 어깨가 조금씩 풀어지는 효과(?)를 나는 줄곧 경험해왔다. 


마냥 행복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나름의 그늘이 있고, 마냥 부유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나름의 결핍이 있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대단한 나이를 먹은 것도, 엄청난 경험을 한 것도 아니지만 살면 살수록, 관계 맺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상대의 사정을 한번 들어나 보려 노력하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란 애초에 어불성설이지만 그럭저럭한 이해만 있어도 삶은 훨씬 더 살만해지니까. 드라마를 보며 자꾸 이런 마음을 다진다면 지나친 의미 부여일까?  


퐁당 2번째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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