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
본격적으로 대학병원에서 다시 실습을 시작하기 전, 본과 4학년 학생은 학교 선배들이 있는 일차의료기관(대충 동네병원이라는 뜻)으로 실습을 간다. 대개 생명과 직결된다는 의미에서 메이저라 불리는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에서부터 신경과/정신과/가정의학과와 같은 마이너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고민을 많이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과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해야 할 때가 온 거다. (엊그제 입학한 것 같은데 벌써 졸업반이라니ㅠㅠ)
작년 한 해동안 솔직히 실습을 가장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돈 과는 정신과였는데 거기를 갈까. 대학병원과 로컬병원의 차이가 상당할 것 같은데 미리 한 번 가보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데. 신경과도 재밌어 보이는데 거기를 갈까. 내과도 뭔가 뒷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한데. 외과는 선배들에게 들은 곳으로 가면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사실 대학병원 실습이 아니다 보니 약간 방학 느낌으로, 느슨하게 풀어주시는 원장님 밑을 일부러 찾아가는 동기들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시간을 쓰기는 싫었다. 학교만 다녔는데 벌써 20대 중반을 넘어서니 맘이 약간 급해져서일까.
결국 외과로 갔다. 외과를 선택한 이유는 뚜렷했다. 외과가 벌써부터 좋아서가 아니라, 과연 수술과가 정말 나와 안 맞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번 실습에도 와 닿는 게 없다면 아마 수술방에는 갈 일이 별로 없겠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다. 대학병원에서 본 것과 별개로, 평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외과는 정말 매력적인 과다. 직접 눈으로 보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그 중 가장 큰 이유다. 돈으로 모든 걸 비교할 수는 당연히 없지만, 미국 의사의 평균 연봉 상위 5개 직종 중 4개가 수술과다. (물론 우리나라는 해당되지 않는다ㅎㅎ)
가서는 정말 많이 배웠다. 이런 게 진정한 도제식 실습이구나 느꼈다. 같이 간 한 명과 매일 이번 일주일이 정말 작년 한 해 어떤 과보다도 보람차고 배운 점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안타깝지만 당연하다. 구조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생명과 직결되는 내과나 외과에서는 당장 자기 할 일도 바빠 죽겠는데 실습학생한테 신경을 쓰는데 한계가 있다. (물론 바쁜 와중에도 고마운 분들이 많이 계신다) 문제는 실습을 할 때 정작 학생은 모르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일 뿐.
어쨌든 외과의가 혼자 개원을 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일반외과에서 당장 가장 기초적인 수술인 맹장수술이나 담낭수술을 하려면 최소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취과 인력이 필요하고, 수술한 환자가 입원을 했을 때 당직을 설 인력도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장님의 주력 분야는 화상과 정맥류였다. 예전에는 항문질환도 했었지만 포괄수가제로 인해 접을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포괄수가제는 일정 질병에 대해 똑같은 가격을 매기는 제도로 현재 항문수술이나 충수절제술이 그러하다. 환자 입장에서는 좋지만 의사 입장에서는 손해일 수밖에 없다. 치핵을 2개 절제하든 3개 절제하든 받는 돈은 똑같기 때문이다.)
화상과 정맥류의 외래 참관 그리고 수술방에서의 정맥류 시술을 주로 참관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는 타이(실 묶는 법)를 연습하고, 병원 앞 정육점에서 돼지껍질을 사 와서 봉합 연습을 빈 방에서 매일 5시간가량 했다. 예전에 외과 의사들이 그렇게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내가 정말로 그렇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 무엇보다도 의사는 되어야 하니 국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어느 병원에서 수련을 받을지도 잘 생각해봐야 하고, 학생연구도 조금 늦었지만 하나쯤은 하고 싶다. 일단 한 해의 시작이 참 보람차서 뿌듯했다. 금요일에 원장님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들은 아마 오래 내 가슴에 남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