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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구 Jun 20. 2020

금 나와라 뚝딱, 밥 나와라 뚝딱

집집마다 금덩어리 몇 개씩은 당연히 다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적어도 할머니 댁에 가면 금두꺼비나 금열쇠 같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일종의 전통 아닌가 했다. 그 번쩍이는 시계와 목걸이가 할머니 것이 아니고, 우리 외할머니가 금은방 가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였던 것 같다.


할머니는 체크무늬 반팔 블라우스에 찰랑이는 정장 바지를 즐겨 입으셨다. 신발도 항상 굽이 3센티 정도 되는 앞코가 뾰족 나온 구두만 신으셨는데, 한시도 가만히 앉아 계시는 법이 없이 하루 종일 또각거리며 움직였다. 할머니는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에 갔다가 바로 이어 아침 수영을 한 뒤 집에 돌아와 아침을 차리셨다. 나는 그 시간까지 이불속에 파묻혀 잠을 자다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꽃향기 비슷한 할머니의 로션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깨곤 했다. 그렇게 아침 설거지까지 다 끝낸 뒤 가게 문을 여셨다.


외할머니 가게는 인천 중앙시장 골목 한가운데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엄마가 고 3 때 돌아가셨고 그 이후로 할머니 혼자 가게를 운영하셨다. 좁고 길쭉한 건물의 1층은 금은방 가게였고 2층부터 옥상은 가정집이었다. 골목 안 대부분의 가게들이 비슷한 구조로 이어 붙여져 있어서, 옥상에 올라가서 한 집 두 집 건너가기 시작하면 못 갈 집이 없었다. 11살 정도부터 혼자 지하철을 타고 할머니 댁에 오기 시작했는데, 동인천 역에 내려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서 할머니 가게에 들어오기까지 7~8곳에 연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해야만 했다. 가방가게 아주머니가 키우는 '포메'라는 포메라니안 강아지는 나를 몇 년을 봤는데도 늘 매대 밑에 기어 들어가 나를 향해 앙앙 짖곤 했다. 그렇게 가방가게, 슈퍼, 한복집을 거쳐 할머니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가게에 있을 때에는 손님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조금 이르거나 늦은 점심을 먹는 일이 많았다. 할머니는 혹여 음식들이 내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올라가서 먹으라고 반찬을 해 놓기도 하셨지만, 나는 1층에서 할머니와 가게 아줌마들이 모여 이러쿵저러쿵 욕을 늘어놓는 걸 구경하면서 먹는 게 더 재밌었다. 우리 할머니는 상스러운 욕도 아주 수준급으로 잘하셨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메뉴는 칼국수였는데, 시장 초입에서 우리 가게까지 쟁반을 머리에 이고 배달을 해 주셨다. 면발의 밀가루가 풀어져 약간은 진득한 느낌의 바지락 칼국수는 국물이 달큼했고, 조그맣게 같이 딸려 나오는 꽁보리밥에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맛은 최고였다. 할머니는 나에게 보리밥 1그릇을 더 내어주고는, 칼국수에 다진고추 양념을 잔뜩 풀어 드셨다. 시장 아줌마들도 마치 경건한 의식을 행하듯 할머니와 똑같이 양념을 왕창 넣고, 연신 땀을 닦으며 칼국수를 드셨다. 나는 보리밥을 두 공기째 먹으며 아주머니들의 욕을 감상하곤 했다.

가끔 시간이 나거나 할머니가 바깥 볼 일이 있으실 때면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있었는데, 나는 할머니를 따라 선지 해장국을 시켜 먹었다. 빨갛다 못해 검붉은 국물은 처음 봤을 땐 무시무시했지만 막상 입에 넣어보니 그렇게 맵지 않았고, 오히려 고소했다. 할머니에게 선지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젤리 같은 것'이라고 해서 선지를 밥에 비벼 야무지게 잘도 먹었었다.


시장에 있다 보면 하루 한 번은 꼭 커피차가 지나간다. 커피 아주머니가 끌고 다니시는 바퀴 달린 수레 안에는 뜨거운 물이 담긴 큰 보온병 몇 개와 커피, 설탕,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가루가 담긴 병들로 가득 차 있는데, 내 눈에는 뭐가 뭔지 구분도 안 가는 것들을 한 스푼 두 스푼 척척 넣으며 차를 타 주는 모습이 마치 마술사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게 문 앞에 앉아 아줌마가 숙련된 손동작으로 커피나 쌍화차를 타는 것을 멍하니 구경했다. 할머니는 커피를 주문할 때 항상 내가 먹을 우유도 같이 시켜주셨는데, 달콤하고 고소한 그 탈지분유 맛 우유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워 종이컵을 살살 기울여가며 아껴 마시곤 했다.


할머니는 늘 바빴지만 음식도 많이 해 주셨다. 할머니가 '칼치'라 불렀던 갈치조림도 자주 상에 올라왔고, '궤'라고 부르던 꽃게로는 간장게장을 담그셨다. 장사꾼답게 할머니는 손도 빨랐지만, 뭐든 꽉 막힌 법이 없었다. 큰 이모가 이혼을 하고 우리 집 사위는 아빠 하나뿐이었는데, 고슬고슬한 된밥을 먹는 가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사위만 진밥을 좋아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밥을 지을 때 쌀을 평평하게 하지 않고 살짝 기울게 해서, 한쪽은 물에 폭 잠기고 한쪽은 덜 잠기게 한 상태로 밥을 지었다. 취사 버튼 한 번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엄청난 수완이었다.


내가 17살 때에 할머니 칠순잔치를 했고, 할머니는 그다음 해 겨울에 쓰러지셨다. 한시도 쉬지 않고 기계처럼 일하고 움직였던 할머니의 지난 70년의 시간이 마치 전생처럼 느껴졌다. 할머니 가게이자 엄마의 고향집인 시장 골목도 지하철역 입구를 만드느라 이런저런 변화들이 생겼고, 우리 금은방 건물은 아예 허물어진 지 꽤 되었다. 살랑이는 실크 블라우스에 뾰족구두만 신던 멋쟁이 할머니는 이제 병원복 위에 등산조끼를 걸친 차림으로 살고 있고, 머리는 늘 빡빡 밀려있다. 그렇게 할머니의 시간이 멈춘 지 15년이 되어간다. 5년 전쯤,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함께 할머니 요양원을 찾았다. 할머니 상태는 하루하루 달랐지만 그 날따라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할머니, 나 결혼해, 손주 사위야, 하고 말하니 할머니가 오랫동안 가만히 날 쳐다보았다. 나 시집 갈 때 자개장 해 준다며, 하니 할머니는 정말 당황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더니 '나 돈 없어'라고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내 것 아닌 금은보화에 둘러싸여 살았던 할머니 인생이 야속할 때마다, 나는 할머니와 시장통에서 칼국수를 시켜 먹고 후식으로 믹스커피를 마시며 누군가의 욕이나 실컷 들어주는 마법 같은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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