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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닥칠 일들이란 꼭 거대한 빚더미 같다. 현재의 삶을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저당 잡힌 채 많은 오늘들을 상납하며 사는 삶. 희한한 빚쟁이 같은 삶이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날엔, 그런 걸 모르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자유로운 날들. 하지만 단 하루도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어깨를 무겁게 쥔다.
오랜만에 스니커즈 한 켤레를 꺼내 본다. 갓 성인이던 해 신던 거다. 검은 가죽은 희게 바랬고 밑창은 닳아 구멍이 나버려 이제는 발을 보호한다는 단순한 기능조차 잃었다. 갓 성인이 되었던 해의 발자국, 다 닳은 밑창만큼이나 얄팍했던 어린애와 성인의 경계선에서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갓 성인이 된 열띤 열기 속을 누비던 기억, 혹은 철없는 호기심을 채우던 순간들? 희미한 느낌만 있고 확실히 기억나는 건 없다. 아마도 그런 느낌 때문에 다 낡은 신발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문득 그랬었지, 그곳에서 신고 있었지 하는 장면이 번뜩 떠오를 것 같다고, 그로부터 다시 한번 괜히 가슴이 뛸지도 모른다고. 정확히 어떤 맥락이 그리운 것인지 조차 모르는데, 어쩐지 여태 버리지를 못한다. 그렇게 새파란 젊음이란 건 내버리지 못한 한 켤레 짐으로 남아있다.
이전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느 기사에서 보았다. 사람 적혈구의 수명이 120일이라고 한다. 넉 달 전에 내 혈관을 흐르던 적혈구는 모두 사라지고, 지금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모두 새것이라고. 그리고 한 해가 지나면 내 몸을 이루는 대부분의 성분이 새것으로 바뀐다고 한다. 그게 분열이든 성장이든, 섭리에 맞게 자연히 소멸한 것들과 그 자리에 새로운 것들이 채워진 것이 지금의 나라는 단순한 진실.
상처 위로 굳은살이 베기며 자연히 단단해진 것이 아닌, 모든 아팠던 날들을 망각한 나.
툭하면 쏟던 눈물도 이제는 어떻게 해야 울더라, 울던 자신을 매해 잊어버린 나라는 별 거 없는 사실. 그토록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 애절했던 감정들. 과거의 모든 순간과 감정은 새로워진 몸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문득 해묵은 신발을 집어든 건 새로운 세포들에 떠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던 이전 내 몸의 신호였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