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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진 Jun 16. 2020

곡기를 잇다

변치 않는 누룽지의 맛

할머니는 봄비다. 춘우(春雨). 아흔여덟 번의 봄을 통과하신 외할머니의 이름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개명을 한다면 꼭 ‘춘우’로 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언 땅을 녹여 새 생명을 자라게 하는 봄비 같은 할머니의 사랑을 촉촉하게 누리며 성장했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쌀과 고구마 농사를 하셨던 외할머니는 봄이 시작되면 강원도에 모를 심으로 오셨다고 했다. 전국에서 모내기가 제일 빠른 양양으로 돈을 벌러 오신 할머니. 내 나이의 세 배를 살아낸 한 사람을 잠시 생각해본다. 기차를 타고 땅을 가로질러 가는 그 길에는 봄비가 내리기도 했을까. 동행하는 남편과 자식도 없이 타지로 돈벌이를 나가는 기분은 어땠을까.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들의 꼬리잡기를 구경한다.


찰랑거리는 논물 위로 푸른 설악산이 물구나무 선채 드리워져 있다. 무릎께까지 새파랗게 자란 보리밭과 비교하니 성긴 모가 심긴 논은 마치 듬성듬성해진 내 머리 같다. 내 머리카락과 달리 저 모들은 땡볕과 소나기를 먹고 쑥쑥 자라나 9월 상순이면 토실하게 영글 것이 분명하다. 강원도처럼 4월 중순에 모를 심으면 모를까, 전라남도에서는 햅쌀 수확이 어려운 이른 추석이 오면 제사상에 올게쌀을 올렸다고 어머니가 그랬다. 논 가의 풋나락을 바심하여 찌고 말려서, 방아를 찧으면 황금색의 올게쌀이 만들어진다고. 외가에 놀러 가면 불투명한 비닐봉지에 담긴 올게쌀이 늘 거실 어딘가에 놓여있었다. 어머니와 이모들은 그 단단한 쌀을 한 줌씩 움켜쥐고는 어금니로 야무지게 깨물어 먹었다. 나도 호기심에 따라먹은 적이 있었는데,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파지자 몇 번 더 씹다가 이내 뱉어버렸다. 이가 좋지 않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노란 쌀알을 입에 털어 넣어 맛있게도 드셨다. 군것질거리가 없던 시절에 먹었던 그 맛이 30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다나 뭐라나.


외할머니는 몸이 약한 자식 여럿을 먼저 보냈던 터라 내가 아프다는 소식에 조용히 울기만 하셨다. 밥 많이 먹고 훌떡 일어나라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았다. 할머니뿐만이 아니었다. 밥을 먹어야 산다며, 억지로라도 음식을 삼켜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이들이 참 많았다. 받은 응원만큼 식욕이 오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3기 암 진단을 받았던 작년 봄부터 나에게 쌀을 삼키는 일은 고역이 되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이 식탁에 오르면 나는 그때부터 링 위의 선수다. 밥상에 마주 앉은 파트너는 선수가 밥을 남기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날카로운 관객이다. 쌀알은 내 목젖을 잡고 버티고 있고, 나는 삼키기 위해 온갖 수를 가져다 쓴다. 그릇과 젓가락을 새것으로 바꿔보기도 하고, 환기를 시켜보기도 하고, 아주 느린 속도로 먹었다가 아주 빠르게 먹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항암제에 지배당한 소화기관은 철옹성 같아 틈새를 찾기 힘들다.


몇몇 항암제는 미뢰 세포에 직접 작용해 음식 맛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특히 항암화학요법은 몸에서 빨리 자라나는 모든 세포를 공격하는데, 세포 분열이 활발한 미뢰 세포도 그 대상 중 하나다. 맛이 변하는 부작용은 항암제 투여 후 일시적으로 나타나지만, 어떤 이에게는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단다. 화학요법을 시작한 후로 나는 채소의 맛이 너무 쓰게 느껴졌다. 그간 육식보다 채식을 선호했던 터라 파트너는 나의 일그러진 표정에 의아해했다. 평생을 먹어온 음식에서 기억과는 다른 맛이 느껴질 때 드는 상실감과 배신감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다. 그렇게 좋아하던 버섯도, 두부도, 달걀도 냄새만 맡으면 신경질이 나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매운 음식은 혀가 불에 덴 것만 같고, 단 음식은 미원을 잔뜩 탄 것만 같아 몇 입 먹지 못했다. 입맛을 돋우기 위해 산미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 구내염이 몇십 개씩 생기기도 했다. 항암제가 입맛을 바꾼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뒤로 파트너는 내가 식사를 하기 힘들어할 때마다 말없이 누룽지를 끓였다.


간밤의 통증에 끙끙 앓다가 뒤늦게 눈을 뜨면 구수한 누룽지 향이 머리맡까지 흘러들어 와 있었다. 나무 수저와 양은 냄비가 부딪치는 소리도, 점도 있는 국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도 좋았다. 하지만 특별히 좋았던 점은 항암제의 공격에도 누룽지는 맛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당히 구수하고 평범하게 따뜻한 곡물의 맛. 물기를 머금은 누룽지는 침이 말라 건조한 목구멍을 부드럽게 넘어가줬다. 간간한 장조림 몇 개나 깻잎 김치 몇 장을 곁들이면 아무리 입맛이 없는 날에도 누룽지 한 그릇은 해치울 수 있었다. 소화가 좀 잘 안 되겠다 싶으면 국물이 죽이 될 만큼 푹 끓이고, 좀 색다르게 먹고 싶은 날에는 누룽지가 아작아작 씹히도록 끓였다. 또 하나의 장점은, 누룽지는 (보통의 암환자들이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식후 복통을 유발하는 빈도가 극히 낮았다. 선조들도 섭식장애나 소화불량을 해결하는 데 끓인 누룽지를 약으로 사용했다고 하니 그 효능을 가히 믿어볼 만하다. 식사의 기쁨이 급감한 상태의 환자가 꾸역꾸역 넘긴 밥 때문에 아프게 되면 꽤 큰 절망감을 마주하고 만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맛을 가진, 먹어도 아프지 않은 누룽지가 참 고맙기만 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무쇠솥을 산 적이 있다. 대장간에서 하나씩 만들었다는 그 솥에 밥을 하면 바닥에 꼭 누룽지가 생겼다. 물을 부어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바삭하게 튀긴 뒤 설탕과 계핏가루를 뿌려 과자처럼 먹기도 했다. 한데 배가 부르면 그 구수한 누룽지가 붙어있는 솥을 설거지통에 그냥 집어넣기도 했다. 불어 터진 수백 개의 밥알을 수세미로 문지를 때면 아버지가 어렸을 적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났다. 수챗구멍에는 도깨비가 사는데 목구멍이 워낙 좁아서 쌀 한 톨만 흘려도 목이 막혀 죽는다는 이야기. 형제와 조카가 많은 아버지는 쌀이 아주 조금 섞인 보리밥만 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데, 아마도 이 이야기는 배고팠던 그 시대를 굽이굽이 돌아 구전되었으리라. 보릿고개를 겪은 가난한 집안의 막내아들과 나 사이에는 50년이라는 도도한 세월이 흐르고 있었고, 그때보다 한참 나아진 세상에서 나는 누룽지도 쉽게 버리며 살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는 삶을 잇기 위해 곡식을 먹었다. 그와 달리 나는 먹기 위해 사는 것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맛’에 지나치게 편향된 식생활을 해오던 나는 결국 건강을 크게 잃었고, 그로 인해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혀를 얻었다. 누군가에게는 하찮디하찮은 누룽지. 쉽게 버리곤 했던 그 누룽지. 하지만 곡식의 단정한 기운이 가득 담긴 누룽지에 삶을 의탁하게 될지 누군들 알았을까. 돌이켜보니 쌀 귀한 줄 몰랐던 나에게 되돌아온 카르마는 아닐까 싶어 씁쓸한 웃음이 난다. 마침 ‘평생소원이 누룽지’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기껏 요구하는 것이 너무나 하찮은 것임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누룽지는 오늘과 오늘을 이어 생존을 꿈꾸게 하는 커다란 선물이다. 신이 나타나 좀 더 살게 해 줄 터이니 오직 누룽지만 먹으라고 한다면 나는 지체 없이 결정할 수 있다. 나는 내년에 내리는 봄비를 맞고 싶고, 사랑하는 이들과 음식과 풍경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조금 그을리더라도 구수하게 살아보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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