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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훈 Mar 02. 2019

<증인>이 되고 싶은 '지우'의 물음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머뭇거릴 당신에게

  브런치에서 발행한 첫 번째 글에서 <챔피언스> 리뷰를 통해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번엔 비연기자 장애인이 아니라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를 '연기'하는 <증인>을 나누고자 한다. <신과함께> 시리즈를 통해 최연소 쌍끌이 천만 배우라 불리는 배우 김향기(지우 역)가 그 주인공이다. 김향기와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는 최근 소신 발언을 이어가는 정우성(순호 역)이다. 현재 손익분기점인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하는데, 임팩트 있는 영화는 아니더라도 조용히 입소문을 타는 듯하다.


"향기야, 17년 전에 아저씨랑 같이 광고 찍었는데 기억나니?"


  한 때 민변에서 이름을 날렸던 순호는 보증을 잘못 선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고 대형 로펌에 들어간 변호사다. 그러던 중 파트너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기회 앞에서 무료 변론을 하나 맡게 된다. 한 노인의 죽음을 두고 가사도우미 미란(염혜란 분)이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데,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바로 자폐 소녀 지우. 미란을 살인 혐의로 기소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검사 희중(이규형 분)에게 털어놓은 지우의 목격담이다.


  영화는 순호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지우의 특성을 이유로 반대하는 검사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지우를 증인으로 세우려 하며 벌어지는 일을 주로 담고 있다. 영화 소개를 제대로 읽기 전에는, 자신의 변론에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어렵게라도 자폐 소녀를 법정에 세우려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순호와 지우는 변호사와 자신이 변론하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목격자의 관계였다.


  영화 <증인>은 꽤나 직설적이다. 오프닝을 비롯해 순호가 고민하는 순간은 자주 광화문 광장에 서 있었으며, 그 광장은 CG로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였다.(세월호 천막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순호의 사무실에선 잘 조직된 것이 분명한 노동조합의 집회 소리가 울리고, 순호의 집 텔레비전에선 수익성 때문에 개발이 안 되는 희귀질환약에 관한 보도가 나온다. 그리고 순호와 애정전선이 보이는 수인(송윤아 분)은 발암물질이 검출된 생리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인다. 영화 후반부 그녀가 순호에게 전송한 문자메시지는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수 석방'이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국회 앞에서 1인 시위 중인 순호의 사진이기도 했다.


정우성의 비주얼에만 눈이 갈 만도 하지만 여기는 광화문 광장이다.


  영화적 구성을 위해 CG로 광장을 임의로 만들지도, 현실의 문제를 두루뭉술하게 피해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대사를 담아내는 매력을 지녔다. 발암 생리대 문제로 싸우는 수인에게 순호는 "우리(발암 생리대 관련 기업의 변호를 맡은 대형 로펌) 쪽에서는 재판 오래 끌면서 지치게, 잊히게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상금에 집중하라."며 조언한다. 그 딴에는 최선의 조언이었을 거다. 결정적 계기는 아버지의 빚이었겠지만 '때가 덜 묻었다'며 '때를 한 번 묻혀보자'던 대표 변호사와 함께 일하며 현실과 타협한 순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랑 소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걸음걸이는 맞추는 것입니다.


  이런 순호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은 검사 희중과 지우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가족이 있어 그들을 이해하고 소통할 줄 아는 검사 희중에게 순호가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하자 희중은 걸음걸이는 맞추는 것을 예로 들며 조언이자 일침을 가한다. 여기서 순호는 나름의 힌트를 얻은 듯 지우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김향기와 정우성의 매력으로 채워진다.

"저는 재판 중인 변호사와 악수를 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증인>이 참 섬세한 영화라는 느낌을 계속해서 받았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는 '파란색'이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지우는 파란색은 '믿을만하다'며 파란색 젤리만 먹고, 파란색 시계를 차며, 파란색 옷들을 입는다.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보노보노인데, 어쩌면 보노보노를 제일 좋아해서 파란색을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순호가 사 온 슬러시 역시 지우는 파란색 빨대로 먹는다.


나와,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니라 각자 다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


  이 섬세한 영화는 연기한 배우들의 태도를 통해서도 강점이 드러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연기하는 배우의 입장에서의 어려움과 고민을 나누면서 김향기의 위와 같은 말을 한다.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그 친구,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늘 달고 연기를 했다고 한다.


  한편, 정우성은 인터뷰에서 천만 영화배우가 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천만은 멋진 숫자죠. 하지만 천만 영화만을 좇을 순 없어요. 300만~500만 영화가 많아져야 영화산업이 더 튼튼하고 건강해지지 않을까요?" 이 배우들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보드게임마저도 파란색이 두드러지는 '펭귄 트랩'을 즐기는 지우


자폐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지우가 쓰러져 누워 있는 병동 앞에 앉아 순호는 지우의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폐가 지우의 엄마든 지우든 선택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당연히 선택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지우는 태어났다. 순호는 지우의 장애를 인생의 큰 걸림돌 정도로 인식하지만 지우의 엄마는 "자폐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건 지우가 아니죠."라며 강조한다. 어려웠겠지만 그걸 수용하고 살아낸 것이다.


  장애를 수용한 건 지우의 엄마뿐이 아니었다. 지우의 꿈은 변호사다. 이유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좋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지우는 본인의 장애 때문에 변호사가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우는 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버거운 그 법정에서 그토록이나 증인이 되고 싶어 한다.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우리는 지우만큼 진실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대목이다.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지우와 지우 엄마


판사도 사람, 변호사는?

  발암 생리대 관련 변론 준비를 하던 로펌의 회의실에서 순호는 도중에 저런 메모를 쓴다. 대표 변호사가 판사도 사람이니 감정에 호소할 필요성을 언급하자 쓴 것이다. <증인>은 자극적인 장면 없이(노인이 죽는 순간을 묘사하는 씬이 그나마 가장 자극적인 씬이다) 비교적 부드럽고 은은하게 전개되는 영화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영화는 관객에게 꽤나 힘 있는 말을 건넨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으로,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사람'이기를 포기하지는 말자고. 당신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기는 무척이나 어렵지만, 적어도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고민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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