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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딩 Oct 28. 2024

시험 일주일 전, 공황이 찾아왔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와 다 내려놓으라 한다.

  독서실에 있다가 아이들의 하원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 부랴부랴 청소와 빨래를 하고 저녁준비를 할 때였다. 별안간 누가 심장을 쥐어짜기라도하듯 뻐근하고 답답해지며 주변의 모든 공기가 휘발된 듯 숨쉬기가 버거웠다. 팔다리의 기운은 모두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이내 곧 저려오기 시작했다. 심장은 또 어찌나 쿵쾅쿵쾅 세차게 뛰던지 심장 뛰는 소리가 바로 내 귓전에서 들리는 듯했고, 이대로라면 숨이 막혀 딱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휘몰아치는 공포감에 베란다로 뛰어가 창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휘몰아치는 내 신체증상에 어찌할 바를 몰라 거실을 서성이다 너무 무서워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빨리 와줘. 숨을 잘 못 쉬겠어.”


그날 저녁부터 나는 독서실에 돌아가지 못했다. 연예인들이 걸린다던 그 공황이었다. 

    

  심장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찾아갔던 첫 번째 병원에서는 심장에는 문제가 없다고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보라 했다. 평소 멘탈이 강한 편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었기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밥 한 숟갈 삼키기가 어렵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이룰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곧바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걸 멈추고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 몸이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니 들어야 한다고. 

  “ 선생님, 저 못 쉬어요. 곧 시험일이에요. 제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수험생활 하는 동안 꾹꾹 참아왔던 눈물샘이 툭- 하고 터져버려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날은 시험 일주일 전이었다.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하다가 결혼 후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며 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도 살아왔다. 나만 믿고 이 세상에 와 준 내 아이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그야말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아이들을 키워내느라 나를 챙기고 돌볼 시간은 없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유치원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가정 경제를 위해서 맞벌이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전업주부로 살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열심히 내 모든 힘과 정성을 쏟아부어 육아를 하고 집안일을 했지만 사회는 나를 '무직'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녀와서 친구 누구 엄마는 간호사래, 누구 엄마는 선생님이래, 누구 엄마는 회사 다닌대 라는 말을 할 때마다 ‘우리 아이들은 나를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그냥 편하게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라는 생각이 들면 괜스레 주눅이 들고 마음이 꾸깃꾸깃해져서 한동안 구겨진 마음을 입고 꾸깃꾸깃하게 지내기도 했다. 


 이처럼 나를 괴롭히고 작아지게 만드는 그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이제 다시 나를 찾아보고자, 대학교 졸업 이후 십여 년 만에 다시 임용고시를 보겠노라 용감하게 선포하고 시작한 아줌마의 수험생활이었다. 아이들 키워가며, 집안일해 가며, 잠 줄여가며 그렇게 어렵게 일 년 반동안 이어온 공부인데, 그 시험이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공황으로 이렇게 꼼짝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인가......


  병원에 다녀와 긴 잠을 청했다. 처방받은 신경안정제를 먹고, 내리 이틀을 잠만 잤다. 나는 살아야 했다. 살기 위해 자야 했다. 공황이 또 올까 두려워 떨었고,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잠을 자야 했다. 약이 있어 다행이었다. 깨지 않고 잘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계속 의존하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안정제 복용이 내키지 않아 최소 용량의 세로토닌 재흡수제로 버티기 시작했다. 몸은 정도로 버틸 있는 몸일까 아닐까 궁금하고 불안했다.

어쨌든 소망은 하나, 멀쩡한 몸으로 시험장에 다녀오고 싶었다. 몸에게, 그리고 마음에게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부탁했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제발 조금만 더 버텨줘. 시험장에는 다녀오게 해 줘.’


 

  그렇게 시험날 아침이 밝았다. 공황으로 인해 일주일 전부터 공부를 거의 못했기에 시험전날이라도 조금만 책을 보다가 자자 생각했지만 봐도 봐도 새롭게 보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책을 보다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불안한 내 심리상태를 반영한 심장이 덩기덕 쿵더러러러러 널뛰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너무 놀랐겠지만 이제 아는 병이기에 나를 다독였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난 죽거나 쓰러지지 않아. 지금 내 뇌가 나에게 잘못된 경고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야. 나는 안전해.’ 

 심호흡을 수십 번 하며 시험장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고 긴장과 걱정에 짓눌려 핏기하나 없는 나를 세상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남편은 운전대를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시험을 치르는 선배들을 향해 교문 앞에서 응원열기가 한창인 대학생들 사이를 조용히 지나 한걸음, 두 걸음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뒤를 돌아봤다. 자식의 임용고시 합격을 간절히 기원하며 두 손 모아 서 있는 수많은 부모님들 사이에 우리 남편이 서 있었다. 우리 남편도 결혼 전엔 몰랐을 것이다. 자기가 와이프의 임용고시 시험장에 따라와 이 많은 어르신들과 함께 합격을 기원하며 기다리게 될 줄은......  



1차 시험장의 복도 풍경.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작이다.

  

  시험장에서 공황증세가 와서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몇 번의 고비를 어찌어찌 간신히 넘기며 시험은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시험문제에 대해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이들 사이를 지나 건물을 빠져나오며 이번 시험은 틀렸구나 직감했다. 

자꾸 실수한 부분들만 생각나고 아쉽기만 했다.

그래도 119에 실려가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고 이렇게 걸어 나갈 수 있으니 이걸로 됐다 마음을 추스르며 수험생들을 기다리는 교문 앞 인파 속에서 남편을 찾아냈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훅 올라오며 눈물이 고였고, 남편은 그런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말했다. 


 “고생했어 여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은 애 키워가며 그 어려운 시험에 도전하려면 힘들지 않겠느냐, 우리는 큰 기대를 하지 않을 테니 행여라도 우리 생각에 부담일랑 갖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마음 편히 도전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시어머님은 매일 새벽 기도를 다니시며 나의 합격을 간절히 기도하셨고, 우리 엄마는 산악회 코스에서 들르는 절이란 절마다 나의 합격기원 초를 켜고 다니셨다. 어려서부터 공부로는 크게 속 썩인 적 없던 딸내미가 임용고시를 보지 않고 기간제교사 생활만 이어가다 전업주부로 지내는 게 못내 속상하셨던 우리 아빠만이 술이 거하게 취하신 날 내게 전화를 걸어

 “우리 딸만 이제라도 임용에 붙어서 교사가 된다면 아빠는 더 바랄 게 없겠다.”  

말씀하셨다. 모두 숨긴다고 숨기셨지만 너무나 잘 보였던 양가 부모님들의 기대감이 1차 시험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올수록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다가와 내 어깨를 짓눌렀고 언제든 공황 증세를 일으킬 기회만 엿보고 있는 불안이는 여전히 내게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던 한 달이 지나고 그렇게 1차 합격자 발표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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