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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Jun 15. 2020

09 삶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볻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우리는 지금까지 비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비전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드려지는 우주적 예배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전은 비록 마지막 때에 성취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의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다.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이란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되기 위해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했지만(17:20,21) 아직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확장 중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이를 달리 말해서 “거룩한 산제사” 혹은 “영적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영적 예배”를 드릴 것인가?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므로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자. 성경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순종(삼상15:22), 사명완수(요17:4), 상한심령(시51:16,17), 감사(시50:23) 등이다. 순종과 사명완수는 무언가 행위와 업적을 나타내는 듯 해서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지만(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본질은 아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본질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행하신 일과 이에 대한 믿음이며 순종과 사명완수는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 전반에 나타나는 많은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광을 받으셨다. 이삭의 탄생이나 출애굽하기까지 내린 10가지 재앙, 기드온의 3백용사, 여리고성 함락, 예수님의 탄생과 기적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46:10)” 라고 기록한다.

  상한심령과 감사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에 대해 인정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상한심령으로 나아갈 때 우리 존재는 부서지고 하나님만 드러나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함으로써 우리의 존재 보다는 감사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드러나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드러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범하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삶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 자체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위의 네 가지를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 이를 설명하기에 위해 우리는 “관계”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순종과 사명완수도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그 분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며 상한 심령과 감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선 영생을 바로 이 관계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영생이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의미에서의 영원한 삶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영생이 단지 죽지 않고 시간의 개념으로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한 뒤 우리의 삶이 그닥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삶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면 우리 인생에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면”(엡2:8중) 영생의 삶은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이 끝난 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믿은 순간 시작되었고 지금 이순간 진행 중인 것이다. 우리는 구약의 “에녹”에 대한 한 줄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강조함에 있어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을 이유로 강조하다보면 율법적으로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기도와 말씀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도와 말씀은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통로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사실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비그리스도인들과 표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원론을 더욱 유의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일상에서 비슷한 삶을 살기 때문에 구분해서 교회일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유일한 일인양 여겨질 위험이 있다. 우리가 유의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가 만나고 알고 지내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인들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소명”을 지은 오스 기니스는 “소명”을 지은 동기를 주유소에 만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난 몇 주간 이야기를 나눈 사람 중에 비그리스도인 중 유일한 사람이 바로 주유소 직원임을 깨닫고 쓰게 되었음을 언급한다.

  우리는 이원론적으로 영역을 구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사회에 섞여서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함을 매순간에 인지하고 있지 않으면 비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다를바 없어 보이는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순간순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십자가)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doing” 보다는 “being”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예배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의식 같은 뭔가를 해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예배란 “하나님을 칭찬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행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 된다. 물론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고 그것을 통해 영광받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순종이란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지 순종의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본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부모된 우리가 자녀들 존재자체로 무조건적으로 기뻐하는 것이지 우리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거나 어떤 업적을 세운 조건으로 기뻐한다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향유옥합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서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14:3~9)


  이 말씀은 어린시절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나도 제자들과 같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는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향유 옥합을 예수님을 위해 사용한 여자를 인정하셨고 기념하라고 하셨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이를 준비한 것이며 달리 말하면 그 여인은 예수님을 예배한 것이다.

  어릴 적에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을 보거나 듣거나 하면 심하진 않았지만 죄책감으로 마음이 늘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간식은 커녕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밥 굶을 걱정 없이 주식 이외의 음식도 먹을 수 있으니 내가 먹는 간식비를 줄여서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만 한다는 부담이 늘 있었다. 그 당시는 어렸고 돈을 버는 입장이 아니어서 결국 아무것도 한 것은 없지만 마음 속 부담은 언제나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위의 말씀을 이해하고 나서부터 나의 삶에 대한 상대적 풍요로움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물론 우리의 소유가 필요이상의 것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필요 이상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말씀하실 때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향유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 머리에 부은 여인이 이 향유옥합을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알고 누구에게 빌려온 것인지 아니면 집에 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추정하기로는 갑진 향유를 집에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고 마침 오신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알게 된 여인이 그에 걸맞게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자들 말처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맞았다면 그 때까지 보관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우리가 이어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오늘 이 시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개입하시고 말씀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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