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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Jun 18. 2020

10 예수님의 비전, 사명, 사역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비전 – 하나님의 영광


  이 책의 기본 바탕은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의 삶은 그 무엇보다 비전, 사명, 사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적절한 본보기가 된다. 예수님은 여러 각도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해 주셨다. 따라서 이 책에서 시도하고 있는 통합적 이해가 없다면 예수님의 삶을 올바로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수님의 이 땅에 위에 오신 목적과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님의 목적은 전도(막1:38, 요18:37), 십자가(요12:27, 롬14:9), 왕(요18:37), 본이 되기 위해(벧전 2:21), 하나님을 영화롭게(요17:4) 등으로 표현된다. 특히 전도에 관해서는 어릴 적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많이 강조되어 왔다. 어린 시절 유명한 부흥강사님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에 대해 강조하신 것들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무리수가 있던 내용들도 분명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5가지가 있는데 말씀, 기도, 전도, 봉사, 헌금 등이었다. 누가봐도 교회 운영을 위한 내용이다. 위 5가지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일 수 있지만 5가지로 마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제한한다면 우리는 종교행위에 고립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예수님도 오신 목적을 전도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대로 강조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혼용되고 있는 목적과 비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전도가 될 수도 있지만 이는 목적의 본질이 아닌 목적의 일부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요한복음 17장에서 드리는 기도를 보면 아주 명백하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4,5)


  여기서 예수님의 사명은 바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이다. 이 사명의 목적이 바로 비전이 될 것인데 이는 바로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이 “영화”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17장 1절 ~ 5절 사이에 5번이나 언급된다. 즉, 예수님의 비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다시말해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명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명시되진 않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었다고 하셨고 돌아가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셨으므로 예수님의 삶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중 예수님만이 할 수 있었고 예수님만이 해야만 했던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사명 – 십자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보통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요약하기도 한다. 조직신학의 성경교리 또한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초점이 되어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으로 정리되어 있다. 십자가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대가였는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조건은 아래와 같다.


1.     죄가 없을 것

2.     수많은 죄인을 구속하기 충분한 대가여야 할 것

3.     죽어야 할 것

4.     사람이어야 할 것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원죄도 없으며 사람이시기 이전에 하나님이시므로 대가로서 충분하고 구속의 대가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었다.

  후에 십자가의 깊은 의미에 대해 고찰해 보겠지만 안타까운 것은 - 십자가가 정말 중요한 것임은 이견이 없겠지만 - 십자가에 초점을 두어 정작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전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삶의 전부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비전도 예수님의 사역도 의미가 없어지고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4:4) 큰 의미를 잃게 된다. 굳이 때가 차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전, 사명, 사역 중에 사명이 핵심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사명에 몰입되어 비전과 사역이 간과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 – 3대사역(가르침, 치유, 전파)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


  예수님의 3대 사역에 관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사명이 십자가이고 그것이 전부라면 예수님은 굳이 3대 사역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3대 사역에 대해서도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씀하신다.(전도-막1:38, 요18:37)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으로 주시기도 하셨다.(제자삼음, 가르침-마28:18~20)

   3대사역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사람들의 사명을 일깨울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십자가 다음으로 공들인 일이 있는데 이는 제자 양성이었다. 안타깝게도 3년의 제자양성 합숙 동행 훈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이 흩어지면서 실패인 듯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 부활 승천 후 보혜사 성령이 오심에 의해 이 제자들을 통해 초대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초석이 세워지게 된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군중 다수를 가르치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시기도 하셨지만 초점은 제자 양성에 있으셨고 12명을 사도로 훈련시키셨고 그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사람을 특별히 더 훈련시키셨다.

 사역은 사명과 관련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사명에 관하여 가르치고 치유하고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이 사명을 위해 사역하셨다. 하지만 이것은 종종 문제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는데 이원론적 관점으로 우리의 사명을 종교적인 사명에 국한시키는 경우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후술할 사도 바울의 사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종교적이고 영적인 사명에만 집중되다 보니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사명을 “직업적 소명”과 연결짓기 쉽지 않다. 예수님의 오심과 초대교회의 형성이 특별한 경우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반화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원론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눅3:23)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기 전 3년 간의 기간을 공생애라고 하는데 성경은 공생애를 약 30세쯤에 시작하셨다고 기록한다. 왜 공생애 사역을 30세 쯤에 시작하였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여기선 논외로 하고 공생애 시작전 30세까지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성경은 30세까지의 예수님의 삶에 대해 많이 기록하진 않는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4복음서에는 주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일화들과 공생애 기간 중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만 기록한다. 다만 누가복음 2장에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있었던 일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갖는 제한 때문인지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2:40)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예수님의 유년 시절 지혜의 수준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비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12살 때 성전에서 선생들과 문답하는 중에 선생들이 놀라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기 때문이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2:47)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적은 것은 실제 예수님의 유년시절에 대해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요한복음에선 예수님에 대한 기록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21:25)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세 이전의 예수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비전과 사명, 사역 세 가지 관점을 가지고 통합적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함이다. 30세 이전의 예수님에 대해서 유년시절 잠깐의 언급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셨다는 점이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13:55) 그리고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은 “랍비”로 불리셨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요1:38) 이 두가지 사실을 근거로 예수님의 삶을 추정하면 목수의 아들로서 목수일을 하셨을 것이라는 점과 랍비로 불리시기 위해 무언가 준비과정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목수 일이야 생업을 위한 일이라 이후 공생애와 십자가와 무관하게 볼 수 있을지 몰라도 비전의 관점에서 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랍비로서의 예수님의 지혜는 유년시절에도 남달랐기 때문에 그 성장과정에서 오늘날처럼 얼마나 많은 책을 보고 아니면 다른 선생님들을 통해서 배우시고 하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예수는 그 지혜과 그 키가 자라가며”(눅2:52) 라는 기록을 보아 30세까지의 삶은 30세 이후의 본격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기간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삶을 정리하면 30년 간 생업을 포함한 사명을 위한 준비기간과 3년여의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비전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30세 이전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고 의미있는 삶인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흘러넘친 사랑으로 인간이 우리가 창조되었다면 창조된 그 자체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학생일 때 특히 대학생이 되어서 바쁜 교회일과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하다보면 정작 우리 본연의 학생으로서의 일이 간과되어 사명보다는 사역에 치중되는 경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사명이 아니라 비전인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국 연속선상에서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사명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수님의 비전 안에서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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