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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Jun 26. 2020

11 예수님의 사명

십자가와 삶

십자가의 진의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교도소 간수장을 하셨던 한 장로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분은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분이었다. 사형수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사형수들이 사형집행 당하는 모습을 많이 보셨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죽음의 공포에 오줌을 지리거나 사형 집행장에 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쳐서 결국 끌려가는 경우들이 많다고 하셨다. 하지만 간혹 담대하게 심지어 노래를 부르며 집행장에 가는 사형수를 목격했는데 바로 예수님을 믿고 찬양을 부르며 담대하게 가는 사형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사형수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간증을 하신 것이다. 이러한 간증은 위 성경구절과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위 성경구절을 묵상할 때면 항상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지금이야 여러 책을 통해 내 나름의 답을 내렸지만 어려서부터 줄곧 고민하던 문제였다. 십자가를 달리시기 전 예수님의 기도는 뭔가 담대하지 못한 점이 느껴졌고 십자가상의 절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몇몇 성경인물을 살펴보면 죽음 앞에 스데반은 담대했고 사도 바울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왜 예수님은 죽음도 각오한 바울처럼 담대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하신 기도에서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애를 쓰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셔서 왜 하나님께서 버리셨냐며 절규하셨던 것일까?

이는 우리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십자가의 진의에 대해 들어볼 기회가 잘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주로 들을 때면 어릴 때는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 커서는 단순하게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정도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존 스토트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설명된 대로 십자가의 진정한 가치를 설명하는 목사님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물론 1년 365일 같은 설교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쯤은 들어볼 법도 한데 개인적으로 주일 설교에서 이런 내용을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은 사망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마치 소속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망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생명에 속해 있는가? 또한 사망의 대립되는 단어로 영생을 언급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영생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단편적으로 사망은 생명이 끊기고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시간적 개념으로 보면 사망이나 영생이나 동일하다. 단순하게 천국에서 사나 지옥에서 사나 그 차이일 뿐이다. 결국 죽음이란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죽지 않는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하)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으셔야만 했다. 그것이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는 대가였다. 그리고 정말 죽으셨다. 존스토트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 예수님의 절규에 대한 몇가지 해석을 소개하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분노, 불신앙 혹은 절망의 부르짖음으로 해석한다. 둘째, 고독의 부르짖음으로 이해한다. 셋째, 승리의 외침이라는 해석이다. 그리고 네번째가 진짜 유기의 부르짖음이라고 본다. 존스토트 목사님은 네번째 해석에 동의를 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로 칼빈의 말을 인용한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육신만 죽으셨다면, 그 죽음은 유효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분의 영혼이 그 형벌을 함께 받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육신의 구속자밖에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정죄받고 버림받은 인간의 무서운 고통을 그의 영혼으로까지 담당하심으로써 더 크고 엄청난 값을 치르신 것이다.” 예수님의 절규대로 성부 하나님의 철저한 버림을 받으셨다. 영원전부터 함께 하셨던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하나됨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존스토트 목사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의 하나님이 연합되어 있다고 한다. 이 신비를 유한한 인간인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고 스데반의 죽음을 귀히 보신 것을 알 수 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성경은 예수님께서 보통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되어 있지만 스데반의 죽음 앞에 서 계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편에서도 이렇게 기록한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결국 예수님은 물리적, 성경적 관점에서 정말 죽으셨지만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까지 육신은 죽을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만은 죽음(하나님과의 분리)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의 위치

 

  기독교에 있어서 십자가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교회 첨탑의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즐비하다. 이런 중요한 십자가가 처음부터 기독교의 상징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익투스(물고기)” 라는 물고기 모양으로 신자임을 표현했다. 요즘도 다니다 보면 차량 뒤에 그 표시를 붙여 놓은 경우들이 여전히 종종 보인다.

언제가부터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교회 본당 정면에 커다란 십자가를 걸어놓은 경우들이 많다. 하지만 십자가는 십자가일 뿐 중요한 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이다. 그리고 십자가 형상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을 위해 만드는 그 어떤 형상도 거부하고 있다. 출애굽 중에 있었던 금송아지 사건도 다른 하나님을 찾은 것이 하나님을 형상화했기 때문이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출32:4) 이 외에도 이스라엘은 모세가 사용했던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기도 했다. (왕하18:4) 성경의 원본이 없는 이유도 우상화될 것을 우려해서 하나님께서 없애셨을 것으로 추정한다.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사명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가 계속 논의하는 대로 여기서 머무르면 안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목적,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십자가를 떠올리면 언제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그래서 십자가를 묵상하고 있으면 “고난”없는 우리의 삶에 죄책감이 들고 만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섭리 안에서 우리가 고난 받아야 할 때도 있지만 고난 자체가 본질이 아니다. 고난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은 우리가 구원받고 잘살고 끝나는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서의 삶을 위함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 속에 임하고 우리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를 보면 두 주인공이 결혼함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을 많이 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험난한(?) 결혼생활이 이어진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는 것으로 끝을 맺어서는 안된다. 결혼생활이 시작되는 것처럼 구원(칭의) 이후에 성화되어 가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명 완수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숨지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다 이루신 것일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상황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심지어 따르던 무리들에게는 모두 떠나가는 배신을 당한 상황이셨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26:31),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죽으신 후 제자들은 제자로서의 삶을 망각한 채 예수님이 부르시기 전에 하던 일 즉 물고기 잡는 일을 하는 것으로 돌아갔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21:3) 물론 결과적으로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을 잠깐이지만 만나시고 오순절 강림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이 3년여 제자양육은 결국 열매를 맺게 된다.

  어쨌든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던 상황은 인간적으로 볼 때 절망적이고 실패한 것 같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긍정의 힘”의 저자 조엘 오스틴은 십자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회피하거나 얼버무린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는 뭔가 부정적인 느낌을 지운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마치 기계적으로 다 완수하고 오셨다는 것일까? 아니면 십자가와 공생애 기간의 사역에서 많은 일을 하셨고 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일까? 그렇다면 왜 하필 그 많은 시대 중에 로마시대에 오셨을까?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4:4)

즉 때가 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예수님은 공생애 첫 표적인 가나안 혼인잔치에서도 때를 강조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2:4) 전도서에서도 “때”를 강조하기도 한다.(전3장)

  결국 예수님은 때가 차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지시기 전까지 제자양성이라는 부수적 사명을 담당하셔서 부활이후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이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훈련시키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사명을 다 이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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