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사명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앞서 요약한 바에 따르면 사명이란 비전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개인적 임무라고 정의했다. “개인적” 특성으로 인해 사명은 우리 각 개인의 자질, 재능, 성격 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사명도 예수님만이 가능했고 완전한 신인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명이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이 말씀으로(행20:24) 설교하시는 많은 목사님들이 바울의 개인적 사명이 마치 우리의 “개인적 사명”인 것처럼 일반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여전히 이원론의 영향아래 있음을 반증할 뿐이다. 물론 복음증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일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지금 혼용되고 혼잡해진 개념들을 정리하고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바울의 사명이 오스 기니스의 소명이란 책에서 언급한 “공통체적(혹은 일반적) 소명”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바울과 동일한 사명을 갖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별적인(혹은 특정한) 소명”(같은 책)으로 적용될 수 없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바울처럼 살 수 없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복음증거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거나 때론 아예 무관심해 버리기도 한다.
바울의 사명이 “공동체적 소명”과 “개별적인 소명”이 혼합되어 있지만 “사명”에 대해 명확히 명시된 몇 안되는 예으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언급된 사명이 바울의 개인적 임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이 구절에서 언급한 사도바울의 사명을 살펴보자. 아주 명확하게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이다. 즉, 3대 사역 중 하나인 “전파”가 사명이 된 사례다. 사실 복음 증거하는 일이란 가르침을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지만 사도 바울의 사명은 “전파”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된다. 다른 신약성경을 보면 이렇게 나와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아볼로와 비교하여 자신은 복음을 전파하고 아볼로는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사도 바울도 한 회당에서 몇 년 동안 가르치기도 했지만 주된 사명은 전파하는 것으로서 복음 증거하는 일이었다. 가르침과 전파의 차이점은 후술하기로 하고 바울의 사명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사도로서의 바울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로서의 바울
바울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다.(행22:3)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다.(빌3:5) 그는 교회를 핍박하던 중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다. 이후에 별도의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3년 간을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오게 된다.(갈1:17) 그 후 바울은 오늘날의 선교사처럼 바나바와 함께 파송을 받는다.(행13:2) 이후 1~3차에 걸친 전도여행과 로마에 투옥되기도 하고 다른 초대교회를 세워가는 일들을 하게 된다.
바울의 신분은 사도였다. 앞서 인용된 사도 바울의 사명은 바로 이 ‘사도’라는 신분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바울은 사도의 자격 논란에 종종 휩싸이곤 하여 곳곳에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 제 7 권에서는 사도의 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부활하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 (행1장) 둘째,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눅6:13) 셋째, 사도는 어떠한 일들을 수행하기 위한 권위와 임무를 받은 사람이다.(고후12:12) 넷째, 사도는 영적인 은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가르치고 교리를 정립하고 진리 안에서 사람들을 견고케 해주기 위함이다. 여섯째, 교회들의 질서를 세우는 권위도 받은 사람이다.
바울은 위의 사도의 자격 요건에 자신이 부합하는 자임을 주장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며 -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9:1) – 자신이 쓴 서신에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고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사실 사도 바울은 다른 12제자들과 같이 예수님과 공생애 기간을 함께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종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받게 되고 이에 대해 자주 변호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누군가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것이 어쩜 당연했을 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당시 자칭 사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내 것과”(계2:2) 자칭 사도인지 보내심을 받은 사도인지 구별이 필요했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러한 사도의 의미를 통해서 사도직은 계승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사도적 계승성도 주장합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일각에세는 교회사에 대한 구분으로 리더쉽에 따라 사도시대-속사도시대-교부시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분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만인 제사장으로서 다같은 제자로 부름받은 성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계급화할 여지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오히려 구약 시대로 퇴행하게 될 수도 있다..
사도적 사명
나는 사도직은 계승되지 않지만 ‘사도적 사명’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공동체의 합의를 거쳐 복음 전파의 효율성을 위해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 비록 좋아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전임사역자로 불리는 목회자들이 사도적 사명을 담당할 수 있다. 목사님들이 사도직을 계승하기 때문에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성에 의해 역할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목사님들 중에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목사님이 없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은사가 있으신 장로님이 설교하시는 교회도 존재한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형식에 젖어 있어 당연하게 생각되던 것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경우들이 많다.
예를 들어 헌금제도만 보더라도 그렇다. 십일조 헌금만 보더라도 의무사항이 아님에도 구약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지켜야 한다고 여전히 주장하시는 목사님들이 많다. 십일조 혁명(대장간)이라는 책에서도 언급되었든 독일의 경우 성전세로 별도로 걷고 남미의 교회들은 따로 헌금이 없이 초대교회처럼 연보를 걷는 형태를 띤다.
비즈니스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들의 경우도 보면 사업과 선교를 병행하셔야 하는 경우가 많다. - 비즈니스 선교 자체가 사업이 곧 선교라는 개념이므로 사업과 선교를 병행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다는 사도적 업무와 구분하기 위해서 병행이라는 말을 사용함 - 바울은 사도임에도 다른 사람들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텐트메이커로서 일을 하기도 했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말씀과 기도는 그 누구의 전유물도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의 합의와 복음 증거의 효율성을 위해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신학을 깊이 공부하신 목사님들이 이 일에 더 어울릴 수 있다는 것 뿐이다.
사명 vs 자아실현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을 보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욕구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생리적 욕구 -> 안전의 욕구 -> 애정과 소속의 욕구 -> 존경의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
그리고 우리나라 옛말에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명을 살펴봄에 있어 자아실현을 살피는 것은 사명이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을 지니므로 자아실현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명과 자아실현은 분명히 지향점이 다르다. 사명은 비전인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는 반면 자아실현은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두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비전과 사명의 관계 정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비전이 없다면 우리의 사명은 방향을 잃게 된다. 비전을 위한 사명만이 의미있기 때문이다. 자아실현 욕구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 자아실현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본질은 비전 안에서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을 향해 달려가더라도 주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명과 관련된 일보다 무시하기 일쑤인 일상의 일들 – 아이들과 놀아주기, 가사일 돕기 등 – 이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께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명은 운명적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까 고민하다가 결국에 이원론의 함정에 빠져 적성에 맞지도 않게 신학교에 가게되거나 아니면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신학교에 가지 못함에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사명을 고민함에 있어 운명적인 사명을 찾아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을 지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과 유사한 비유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갈 방향을 알지 못한 채 노를 들고 수면 위에 떠 있는 배를 탄 것과 같다는 비유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의 할 일은 노를 젓는 일이고 만약 방향이 잘못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바꿔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우리가 방향을 몰라서 할 수 있는 노를 젓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운명적인 일은 거의 없다. 우리의 할 일은 현재 주어진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선택의 순간이 오면 기도하면서 지혜롭게 결정해 가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어릴 적부터 꿈꿔온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화될 수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처럼 정점의 자아실현 단계에서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 전단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으로 자신의 사명을 제한하며 살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나 역시 어릴 적 희망했던 직업이 회계사였던 이유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담을 좀 내려 놓았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꿈을 내려 놓거나 포기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현재에 충실하면서 그렇다고 타협이 아닌 수긍하면서 조금씩 내 안의 꿈을 키워 간다면 운명적인 사명찾기에 대한 부담을 좀 떨어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