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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Jul 18. 2020

13 비교할 수 없는 사명

베드로와 요한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쌔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찌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5:15-30)


  우리는 누구나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순간 순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괜찮은데 운동도 잘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들이 드는가? 부러워 한 적은 없는가? 신앙인으로서는 그런 사람들이 심지어 신앙까지 좋은 경우들을 본다. 내색은 하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들 앞에 약간 기죽은 상태로 자신 스스로를 초라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종종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학창시절 집은 부유하지 못했고 공부는 어느 정도 했지만 상위권은 아니었으며 키도 크지 못하고 운동이나 악기 등은 잘 다루는 것이 없었다. 그냥 공부만 어느 정도 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활달하거나 사교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주일학교에서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언제나 알게 모르게 기죽어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태는 대학교 1학년 때가지 지속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선교단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고 난 후 성경읽기에 열중을 올렸었다. 대학생부터 교회 선후배들과 알고 지낼 수 있는 기회가 더 커짐에 따라 자연스레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과 달리 취업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덜 치열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외면하고 있어서인지 크게 걱정없이 교회 공동체 생활과 소위 신앙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나의 역할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를 테면 청년부 임원과 성경공부 소그룹 리더 같은 것들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즉, 나의 기호를 말하는 것이 쉽지 않게 느꼈었다. 하지만 이런 역할들을 통해 내가 성경을 가르칠 때 기쁨이 있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 때 신학교를 가야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도 했었다. 그러면서 내가 공부 외에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 소위 자존감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더욱 더 큰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에 더 나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여전히 부러워하고 자신을 좀 안타깝게 여겼었다.

  그런 과정에서 이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2가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첫째는 달란트가 “각각 그 재능대로”(마25:15) 주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으로부터 받은 칭찬이 동일하다는 것이다.(마25:21,23)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에선 과정보단 결과가 우선되고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성공요인에 대한 답변으로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당시 사회인프라나 환경에 공을 돌리는 반면 우리나라 성공신화는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한국의 유명한 사업가, 정치인들의 자서전들을 읽어봐라)

  성경은 재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 재능엔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8)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1) 그리고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은 “재능 안에서의 최선”이지 “절대적인 결과의 크기”가 아니다.

  로마서 9:21에 관해 하나님께서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릇의 크기나 귀천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목사님들을 많이 보았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여전히 찜찜하다. 귀하고 깨끗한 그릇인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나 부러움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파이더 맨” 영화를 보면 매우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인데 매우 성경적이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

  그러므로 이 달란트 비유도 결국 재능에 따라 결과를 판단받는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그대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그대로 두 달란트를 남겼지만 동일한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다. 즉,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최선은 한 달란트 남기는 것이지 두 달란트, 세 달란트가 아니다. 오히려 적게 한 달란트 이하를 남겼어도 문제 될 것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비유에서 자본주의 개념인 원금과 이자를 이야기하고 있고 그렇다면 금액에 따른 수익 기회가 달라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개념에 부합하니까 말이다.

  혹자는 한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투자하거나 비유 그대로 장사하기에 부족한 금액이 아니냐고 말할 지 모르겠다. 나도 처음엔 이 말씀이 한 달란트 가진 자가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가진 자들과의 비교의식 속에서 자격지심으로 장사하는 것 자체를 꺼렸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금 한 달란트의 가치를 현재 가치로 대략 환산해 보면 - 물론 평가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한 달란트를 6천 데나리온으로 보는데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니 환산해 보면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을 경우 16년 이상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보단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이 들었을 지 모르지만 절대적으로 보면 땅 속에 묻어두고 무시하기엔 작지 않은 금액인 것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적은 돈, 혹은 적다고 생각하는 돈은 – 사람마다 돈의 많고 적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 무시하기 일쑤다. 그러다 큰 돈이 생기면 이 돈을 어떻게 굴릴까 생각하게 된다. 즉 돈에 대한, 재능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

  부자언니로 알려진 유수진 강사는 강의를 통해 우리가 한 끼 식사 값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 무심코 마시는 프랜차이즈 커피 한잔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내면에 “어차피 부자가 될 수 없는데 오늘 이 커피 한잔의 행복을 포기할 이유가 없어”라고 태도가 자리잡고 부자가 되고 싶다고 정작 말하면서도 부자가 되기 위한 준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어릴적 인이 박이도록 들은 것처럼 당장은 작을 지 모르지만 누적이 되면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된다.

  한 달란트가 작은 돈이 아님을, 즉 작게 여겼던 내게 주어진 재능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또한 나보다 더 많은 재능을 받은 사람을 부러워 할 것 없이 내게 주어진 재능 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결과를 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깨닫게 되자 내 안에 자유함이 생겼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이유가 없어졌고 오히려 내가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처럼 여겨졌다. 우연찮게 대학 청년부 1학년에 갔던 수련회에서 했던 은사테스트를 4학년 때인가 다시 보게 되었을 때 1학년 때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은사들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있음을 발견하고 더욱 그렇게 느끼게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21,22)”


  예수님의 12제자 중 특히 3명의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과 좀더 특별했던 것 같다. 특별한 순간에 이 3명의 제자만 동참시키셨기 때문이다.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이 3명만 동행시키셨고 -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니(막5:37)”. – 변화산상에도 이 셋을 데리고 가셨다.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마17:1)

  그래서일까? 베드로는 요한과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베드로를 다시 부르셔서 3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요21:17~19)

  그 사명은 “내 양을 먹이고 나를 따르라”는 것. 그 과정에서 순교할 것을 암시하셨는데 전승에 따르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어느 정도 보여주려는 듯이 사도요한은 12제자 중에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제자이다.

  우리가 선교적 소명을 받았을 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듣지만 “나는 아니겠지” 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 있으리라 생각된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주변에 믿음 좋고 예수님 잘 믿으면서 사업도 잘 되고 잘 먹고 잘 사는 분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적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인지(?) 12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오래 살았던 복 많은(?) 제자임에 틀림없으리라. 성경에도 사도요한이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임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요21:20)”,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뜰에 들어가고(요18:15)”

  즉,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며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할 수 있는 제자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유일하게 부인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은 제자였다.

  이렇게 각별하기 때문에 오래 살았던 것일까? 아니면 마리아를 모셨기 때문일까? 성경에도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한다는 말씀이 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장수가 기본적으로 “복”인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쉽게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오래 살아 좋았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사도요한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과 야고보에게 별명을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우레의 아들”이다. “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 하셨으며(막3:17)” 요한은 야고보와 같이 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판단된다. 이런 요한이 동료 사도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심지어 그 형제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하게 된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12:2), 11명의 사도들의 순교를 지켜보면서 자신도 순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요한에게는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 즉 마리아를 봉양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의 삶은 다른 11제자보다 못한 삶이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평가할 수도 없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라거나 일반적인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 그만이다. 여전히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고 부러워 한다면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했던 음성을 들려 주실 것이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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