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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Jul 18. 2021

모란, 드르륵 탁

국립고궁박물관 <안녕 모란>전

국립고궁박물관 <안녕 모란>전. 예고가 올라온 봄부터 어떤 기획일까 흥미롭던 전시였다. 내게 모란은 안녕보다는 부귀의 상징이기에, 어떻게 안녕이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모란을 풀어낼까 궁금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할 것인가: yes!

전시를 보고 나오자마자 근처에 사는 가족에게 연락해서 꼭 이 전시를 보라고 권했다. 그러잖아도 그도 이미 보러가려던 참이었다고 함(머쓱).





특징: 즐거움이 많은 전시

기획자는 매력적인 포인트를 많이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모란 향기가 풍기는 정원, 실감형 프로젝션, 그림자 방, 손부채— 고민의 결과로 만들어졌을 아기자기한 창의들이 관람객들을 호호 웃게 한다.

이건 직접 가보시면 아실 것.



모란... 드르륵, 탁! 모란... 드르륵, 탁!



그런데 뭐랄까, 이제 고미술 전시도 인스타 갬성 맛집화되어가는 것 같은 쓴맛이 따라온다. 그리고 이럴 때 뮤지엄들은 막 오픈한 카페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건 약간 여러 의미에서 '재질'의 문제.


명도와 채도가 높은 꽃무늬 영상이 배경에 깔리며, 세월에 빛바랜 왕실 혼례복의 화려함은 풀이 죽는다...


부산스런 조화 모란으로 꾸며진 공간들이나, 단순한 패턴으로 구성된 애니메이션이 너무 많이 배치되면서 텍스트가 강조하는 모란의 상징성과 품격을 관람객의 감각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다른 위치의 진열장 유리에 영상 빛이 푸르스름하게 반사되며 진열품의 색을 가리는 것도 슬픈 부분.




한 가지 더 생각해 본 부분. 트렌디함의 반대말이 트렌디하지 않음이 아닐 수 있다는 것.

특히 모란 정원으로 꾸민 공간은 "내려다보며" 사진으로 찍기 좋은 장면들은 많지만, 감상은 어렵다.

설명카드는 바닥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한 해서, 읽으려면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나기의 반복.


포토제닉(사진이 잘 나오는), 인스타 스타일을 단순히 일반인 관람객들이 반가워하는 트렌드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 트렌드를 주로 소비하는 계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왜 이런 연출을 좋아하며 어떤 목적으로 자신의 SNS에 공유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지향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가치와 어느 정도 부합하는가 하는 판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비장애인 관람객들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연로한 분들이나 장애인들은 이 설명카드를 하나하나 읽고 그림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커다란 전시실 안에 둘러친 모란병풍. 저 가운데에 있고 싶다...


시각적인 아쉬움을 하나 더 꼽자면 모란병풍을 벽면에 쫙 둘러친 방의 임팩트가 실제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힘이 떨어진다고 느껴진 것. 네 폭이든 여덟 폭이든 본래 병풍이란 물건은 사람이 가까이 더불어 있을 때 압도감이 살아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멀찍이서 볼 때 오히려 눈에 매끄러운 서양의 태피스트리와는 다르게.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첫 병풍 전시에서 톺아보는 방식을 강조했던 것이 놀라웠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이 '모란방' 한가운데에는 왕실용 가마와 의자를 진열한 커다란 유리장이 있다. 가운데에 서서  돌아보면 시야 가득 모란병풍들이 들어오는 호사를 누릴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안타까웠다. 사실 그랬다면 꽃무늬 영상 같은 건 하나도 필요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화려하고 풍성한 이미지들이 있는데.

역시 실물만 한 최상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스토리텔링은 왕실의 흉례에마저 모란병풍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실제 전시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가 효과적으로 와닿는가 하면, 조금 갸웃.

모란은 소재이지 주제가 아닌데, 아마 이 전시의 주제가 될 '안녕'에 대해선 충분한 해석이 이뤄지지 않은 느낌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전시실 안팎의 텍스트들이다.


공간 안내엔 짧고 감상적인 문구가 쓰이기도 했지만, 전시품에 관한 텍스트들은 거의가 도록에서 볼 법한, 관찰로 대체 가능한 유물 설명들이다. 미디어 요소를 도입하며 공간 자체가 컨텐츠가 된 상태에서 이 설명들은 간과되거나 눈에 들어오다 흩어져버린다.


전시 도입부에 보이는 소개글.



전시 안에 있는 텍스트들은 소개글과는 온도차가 크다.



여기 있는 모든 것에 모란이 있다는 것도 알겠고, 모란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알겠다. 그러나 전시의 언어는 모란을 통해 보는 안녕까지 가닿지 못하고, 계속해서 모란, 모란, 모란에서 멈춘다(드르륵 ).

 머뭇거림은 말미에 보이는 인터뷰 영상에서 양태오와 안성민 작가가 거침없이 자기 식대로 모란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과 무척 대조적이다.


길한 일에도 흉한 일에도 모란을 찾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안녕이란 얼마나 넓은 폭과 많은 결을 지닌 의미인가.

그 생각을 따라가며 관람객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어떤 것이 안녕함인가 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돈인가, 사람인가. 그것은 조상신이 가져다주는 것인가, 아니면 각자가 각자의 안녕을 외벌이하고 있는가.


소개글에 언급된 것처럼 2021년은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와 안녕을 기원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돌아보는 모란은 분명 기복적 성격의 길상이라는 맥락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 왕실의 장례라는 의외의 상황을 추가함으로써, 보다 우아한 기원의 방식으로서 재조명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식으로 모란의 의미가 보다 뚜렷한 시의성으로 완성되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조선과 왕실이 남긴 문화재들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 역시 새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알지 못한 채 관람객은 전시실을 나서게 되고, 이 전시는 잠시 기분을 '안녕'하게 해주는 '모란'에 대한 것으로서 기억된다. 이게 정말 기획자의 의도였을지도 모르지만, 자꾸 가려진 가능성들이 보여 발 떼기가 아쉬운 좋은 전시였다.



예산이 더 넉넉했다면 훨씬 환상적인 연출이 되었을 것 같은 아쉬움은 1차적인 것.

그보다는 강렬한 주제를 담아내기에 지금 같은 클래식하고 예쁜 텍스트가 과연 적절한 그릇인가 하는 고민이 마음에 더 남는다. 우리 문화재 전시에는 훨씬 더 많은 물음표와 느낌표가 필요하다.




가장 좋았던 전시품: 열세 살에 혼례를 올린 복온공주(1818~1832)의 혼례복. 동정 목둘레가 너무 작아서 왠지 마음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중간에 열 살 남짓한 어린이들이 활옷 앞에서 폴짝, 뛰었는데 체격이 꼭 그만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안녕모란 #옛날문화재를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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