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홀로 외롭게 싸우지 않기를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운동, 이른바 ‘봄 혁명’이 일어난 뒤로 내 하루는 두개의 시간대 위를 흐르고 있다. 그곳 시간은 한국보다 2시간30분 느리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지어 먹고 한숨 돌릴 때, 이제 막 초저녁이 된 미얀마에서는 어둠 속에서 총성이 울리고 주택가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영상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매일 밤 베개를 베고 누울 때마다 시계를 한번 쳐다보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의 밤이 무사히 흘러가기를. 내가 조금 앞서 지나가는 이 시간을, 저 사람들도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맞이할 수 있기를.
미얀마 시민불복종운동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건 2월부터다. 처음에는 포털에 ‘미얀마 돕는 방법’을 검색했다. ‘세 손가락 경례’ 인증샷이나 해시태그 챌린지 말고, 미얀마 사람들에게 쌀과 돈을 전하는 뭔가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한국에서 일하는 미얀마인들이 현지 공무원들을 돕는 모금을 진행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검색을 거듭해 주한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에서 미얀마어로 게시한 성금 안내를 찾고 후원금을 보냈다.
평소라면 나는 여기서 멈췄을 것이다. 운동이나 활동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니까. 나의 사회적 실천은 늘 ‘이것밖에 못 해서 어쩌지’와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단 낫겠지’ 사이에서 끝나곤 했다. 촛불은 들어봤지만 피켓은 들어보지 않은 사람. 나는 딱 고만고만하게 세상일에 끼어들었다 뒷걸음쳤다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번엔 뭐라도 더 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이, 지금 미얀마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우리의 광주와 닮아서였다. 다만 광주는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지만, 지금의 미얀마는 내가 잡아줄 수 있는 손 같았다.
나는 그날 바로 미얀마와 연대하는 단체에 가입하고, 에스엔에스(SNS)와 커뮤니티에 미얀마 소식을 한국어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헌책을 팔고, 소소한 교정 아르바이트로 번 용돈을 조금씩 후원금으로 헐었다. 그러다 보니 3월27일에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미얀마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을 때는,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띄엄띄엄 앉은 사람들 속에 나도 있었다.
그날은 하루 동안 미얀마에서 114명이 군인들 손에 숨진 날이었다(그중 14명은 어린이였다). 추모 행사에 참석한 재한 미얀마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미얀마 시위에서 외치는 구호를 들려주었다.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 (그것이 시민의) 의무.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의무라 해도, 그들이 홀로 외롭게 싸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봄비라기엔 너무 찼던 비바람을 뚫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쟁취의 의무를 함께해온 오래된 교회당에서 울리던 외국어가 계속 귓전에 맴돌았다.
여태까지의 삶에 없던 이런 유난한 마음은, 때론 ‘내가 뭐라고’ 하는 머쓱함에 발목을 잡히기도 했다. 나는 활동가도, 기자도 아니다. 남에게 동참을 호소할 만큼 투철한 시민의식이나 인류애를 꾸리며 살아온 인간도 아니다. 아무도 내게 ‘미얀마 얘기 좀 그만하세요’라고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런 걸 했다고’ 하는 자기검열은 항상 내 안에서 비롯되었다. 꾸역꾸역 소심한 참여를 계속하면서도 내가 나에게 낯을 가리는 듯하던 미묘한 마음. 나는 그걸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작가 이불의 전시를 보러 갔다가 비로소 털어버리고 올 수 있었다.
미술관 로비 한가운데 놓인 이불의 작품 <히드라>는 높이 10m에 지름 7m짜리 풍선이었다. 풍선과 연결된 여러개의 공기 펌프를 밟아서 일으켜 세우는 관객참여형 작품이었다. 조금 앞서 입장했던 사람들이 열심히 펌프를 밟고 있길래, 나도 이게 뭔가 하는 호기심으로 발을 얹어보았다. 툭 깨진 계란처럼 납작하게 꺼져 있던 풍선이 느릿느릿 남실남실 부푸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날 나는 전시실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3시간 내내 그 자리에서 펌프만 밟다가 돌아왔다.
사실 나는 관객참여형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연극을 보든 전시를 보든 배우나 작가들이 관객을 내버려둬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런데 그날은 마치 홀린 듯이 땀을 뻘뻘 흘리며 펌프를 밟았다. 미술관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작품을 발견하지만, 제작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흥미로워서였다.
가방까지 벗어놓고 한참을 밟는 사람도 있고, 주춤주춤 다가와 딱 한번 밟아보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위층 난간에서 로비를 내려다보며 사진만 찍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어린이는 약속에 늦었다는 엄마의 성화에 울상을 하며 떠났다가, 한 시간 뒤 다시 돌아와 또 한참 펌프를 밟고 가기도 했다. 로비를 지나다니는 모두가 펌프를 조금씩만 밟아주면 풍선이 금세 팽팽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잠시라도 같이 펌프를 밟아주는 사람들도 다 반가웠다.
그리고 맨 처음 펌프를 밟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나는 서로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은 채 몇 시간 동안 무언의 응원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마 그쪽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 사람 하는 동안까지는 해야지’ 그러면서 지금껏 ‘나와 다른 사람들’처럼 여겨온 활동가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이제껏 그런 용기나 엄두를 내본 적 없지만, 사회문제에 뛰어든 활동가들도 처음엔 그냥 이렇게 시작한 건 아닐까 하고. 미약한 움직임으로 거대한 풍선을 일으키는 행위가, 마치 나 하나로 세상에 길을 내겠다는 서원(誓願, 맹세)을 세우는 삶처럼 느껴졌다.
그날의 도전은 미완으로 끝이 났다. 발갛게 된 얼굴로 애쓰는 관람객들이 안쓰러웠던지, 폐관 시간이 다가오자 지켜보던 미술관 직원들까지 하나둘 모여 힘을 보태주었다. 그 덕분에 풍선을 거의 다 일으키긴 했지만, 완전히 팽팽하게 펴지는 못한 채로 나는 포기를 선언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웃옷을 챙겨 입는 내게 중년의 직원이 말을 건넸다. 옆에서 정장에 구두 차림으로 열심히 펌프를 밟아주던 분이었다. “사실 이 작품은 총 4만번을 밟아야 다 펴지게끔 설계가 되어 있어요. 오늘 완성이 됐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4만번,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의 무언가가 탁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려 4만번을 밟아야 완성되는 것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애초에 저 거대한 풍선에 덤벼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당장 내 눈에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펌프 한번을 밟으면 4만분의 1만큼의 공기 한 줌이 저 풍선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그러니 나는 여기에 있지만, 미얀마의 삶들도 계속 더 높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고.
2021년 4월 9일 한겨레신문에 게재한 칼럼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90433.html#csidx593b06f2d05c687bc566163b312b37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