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돼지찌개가 좋다고 하셨어
가정의 달이 돌아왔지만 여섯 식구 얼굴을 한번에 다 볼 일은 아직도 요원하다. 우선 외국에 사는 둘째 언니가 아직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있다. 올해가 되어도 코로나19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언니가 사는 도시는 두번째 봉쇄를 앞두고 있다. 그럼 우선 국내에 있는 사람끼리라도 보면 어떤가 싶지만, 대가족은 그것도 쉽지가 않다. 한 사람 빼보았자 머릿수는 이미 ‘5인 이상 집합금지’ 기준을 넘어서는 데다, 직계가족이란 예외도 통하지 않는 철저한 거리두기프로 님이 도통 모임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중에서 거리두기를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은 아빠다. 젊어서는 하루에 세시간씩만 자고 온통 일 아니면 축구와 바둑에 매달리던 아빠는, 중년 이후 몇번 수술을 받고선 오로지 건강제일주의로 일관하게 되었다. 건강식을 챙기고, 규칙적인 수면과 운동을 취한다. 그리고 코로나19 앞에서도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백신이 나오고 우리 가족 전원 접종을 완료하기 전까지 가족 모임은 없다.”
아빠의 선언은 전염병이 등장한 지 1년 반이 되어가는 지금도 철통같이 지켜지는 중이다. 어버이날을 앞두고서 고향에 내려가볼까 하고 부모님께 넌지시 이야길 건넸지만, 역시나 단호한 답장이 돌아왔다. ‘ 야, 화목보다 생존이 우선인 시기다. ’ 결국 지나간 생신 때와 똑같이 용돈과 꽃바구니만 보내드리고, 그래도 어버이날 아침에는 기념 삼아 영상통화를 했다. 화면에 비친 아빠의 머리가 새하얬다.
화제는 여느 때와 비슷했다. 가족과도 친구와도 마음대로 교류할 수 없는 답답함의 토로. 이게 너희 세대의 눈물 젖은 빵인 셈이라는 농담 섞인 훈계에, 그럼 아빠도 젊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았느냐고 묻자 아빠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야, 인마. 그때 빵이 어딨노! 눈물이고 빗물이고 젖은 빵도 없어서 못 먹었지!”
(화난 게 아니다. 경상도 할아버지라서 그렇다)
그러고는 갑자기 전화 너머에서 아빠의 자취 경험이 술술 풀려나왔다. 아니 이 어르신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싶을 만큼, 가볍게 건 안부 전화는 갑자기 인터뷰로 탈바꿈해 한참을 이어졌다.
그날 아빠가 들려준 홀로살이 이야기는, 반은 익숙하고 반은 낯설었다. 내가 아는 이야기의 절반은 대략 이러하다. 아빠가 중학교도 없는 깡촌의 우등생이었다는 것. 선생님들의 강권으로 국민학교 졸업 후에 타지로 유학을 나오긴 했는데, 돈이 없어 하숙과 자취를 옮겨 다니기를 반복했다는 것. 그리고 밥 먹을 시간도 아까울 만큼 공부가 좋아서, 헌책방에서 산 <성문영어>를 생쌀을 입에서 불려가며 3회독 했다던 것(아빠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 외운 영어책 구문을 잊어버리지 않고 줄줄 외곤 했다).
학생 땐 아빠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게 싫었다. 본인은 그렇게 힘들어도 죽어라 공부를 했는데, 너는 이렇게 편한 환경에서 왜 열심히 하지 않느냔 질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들은 이야기는 어릴 적 들은 위인전 같은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많았다. 생쌀을 씹어 먹으며 공부한 이유는 밥 먹을 시간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곤로에 밥 지어 먹을 석유 살 돈이 없어서였다는 것. 냉장고조차 귀하던 시기라, 본가에서 김치 한 통을 얻어오면 그게 쉬어 터지도록 오로지 맨밥에 김치뿐인 식사를 이어갔다고 했다.
“그러다 김치도 없으면 된장을 좀 꿔다가 먹었지.”
된장찌개를 말하냐고 되물었다.
“아니, 된장. 그냥 된장. 그것도 빌려 먹는 마당에, 이것저것 넣어 끓여 먹을 여유는 없었어.”
날된장을 밥에 비벼 먹다, 옆집에서 김치를 끓여 먹는 냄새가 풍기면 그렇게 군침이 흘렀다니. 우리 아빠의 ‘최애’ 요리가 여전히 돼지고기와 마늘을 듬뿍 넣고 진하게 끓인 김치찌개라는 것이 생각난 나는 조금 서글펐다. 그래도 아빠는 젊은 시절의 자취 경험에 무척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도 고지식한 경상도 할아버지지만, 다 큰 어른이 혼자 밥도 해 먹을 줄 모른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하는 목소리가 무척 신이 나 보였다.
아빠 이야기를 듣다 보니 확실히 자취라는 것의 의미가 꽤 달라졌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됐다. 아빠의 자취는 네이버 웹툰의 장수 작품이었던 <가우스 전자>에 나오는 고득점이라는 캐릭터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단벌 정장으로 고시원에서 버티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자취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훌륭한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업을 얻어 안정적인 삶을 이루겠다는 것. 우리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반면 요새는 혼자 산다는 것이 예전과는 의미가 다르다. 나의 홀로살이 역시 그저 삶의 한 형태로서 시작되었다. 학교에 가야 하니까 본가를 나왔고, 서른이 되니 이젠 혼자 살 때가 된 것 같아 독립도 했다. 여유롭지만은 않았지만 반찬 하나를 못 놓고 먹을 만큼 가난해본 적도 없다. 사실 고득점처럼 투철한 절약 정신과 출세욕으로 무장한 인간형은, 그 캐릭터가 등장한 2010년대 초반에도 젊은이들에겐 이미 이질적인 것이었다. 바야흐로 ‘욜로’의 시대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으니까.
고득점처럼 고생을 해가며 타지에서 공부를 마쳤지만, 아빠는 편안한 엘리트의 삶을 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만화를 본다면 아빠는 분명 귀신 나오는 옥탑방에서 아득바득 성공을 다짐하는 고득점의 모습에 강한 동지애를 느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50여년이 지나도 이토록 그의 삶에 생생하게 새겨진 자취 역시 ‘버티는 시간’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혼자 타지에서 생활한 어리고 외로운 소년을 상상하며 대견함과 안쓰러움을 느낀다. 잔소리가 싫던 막내딸도 이제 홀로살이의 빛과 그림자에 익숙해진 어른이 되었다.
어버이날의 긴긴 통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아빠가 자취를 할 적엔 항상 점심을 굶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이건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엄마가 이야기를 거들어준 덕분에 알게 된 것이었다.
“당신 점심도 못 먹고 다녔잖아, 그거 얘기해 줘.”
혼자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느라 도시락 쌀 여유가 없었냐고 하자, 아빠가 멋쩍어하다 대답했다.
“아니. 친구들도 다 유학생이라 가난해서 점심을 굶고 다녔어. 나만 먹기가 미안해서 그까짓 거 한끼 같이 굶은 거지.”
옆에서 엄마가 다시 끼어들었다.
“진짜 너무 너네 아빠스럽지 않니? 근데 너는 그런 거까지 닮지는 마.”
나는 아빠와 엄마를 사랑하지만, 그날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두 사람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아무리 어렵던 시절에도 아빠에겐 그 나름의 연대의식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나의 아빠라는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을 엄마가 알고 있다는 것이 기뻤다.
내 옅은 눈썹과 둥근 얼굴형, 집중하면 오리 부리처럼 입술을 쭉 내미는 버릇까지 모두 아빠의 유전이다. 그러나 그런 것 말고도 내겐 눈에 보이지 않는 친탁의 요소가 또 하나 있는지 모른다. 팍팍함에 지지 않는 그런 보드라운 마음을 나도 물려받았을까? 아니면 태어날 때 벌써 받아놓고도 여태 발견을 못 했던 걸까? 또 오리처럼 입술을 내밀고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을 샅샅이 뒤져보는 5월이다.
2021년 5월 22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