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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Feb 05. 2023

그림 마음대로 보기: 해 잘 드는 정남향 그림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조선, 병풍의 나라 2>


머리를 식히러 옆동네까지 산책을 나갔다가, 응달에서 자라는 벚나무 한 그루에 눈이 갔다. 나무 줄기 한 면에 이끼가 세를 키우고 있었다.

 어릴 적 ‘자연’ 시간에 배운 대로, 나무 한 그루에서도 남쪽과 북쪽이 보인다. 북쪽을 바라보는 면은 줄기와 나뭇가지에 이끼가 잘 낀다.

대개는 저 뒤 은행나무처럼 녹색 털옷을 입은 듯 이끼로 뒤덮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저 벚나무의 이끼는 동글동글 피어난 게, 옛그림에 이끼를 표현하는 방식인 태점(苔點)과 꼭 닮았지 뭔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십장생도 창호 중 일부, 19세기 말-20세기 초.


태점은 바위나 나무, 땅 위의 이끼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동글동글하게 그리는 경우가 많다. 십장생 그림에서 물을 들이키는 사슴 주위, 코발트 그린과 청색으로 채색한 각진 바위 위의 물방울 무늬가 보이시는지. 검은 테두리를 두른 초록 동그라미가 바로 태점.


김홍도, 금계도병풍 중 세부, 개인 소장


김홍도가 정조의 명으로 일본 병풍을 모사한 금계도의 나무와 바위에는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태점들이 나타난다. 비정형에 가운데가 시커먼 모양이 마치... 약간... ㄱㅍㅇ를 연상하게 해서, 내 취향은 아니다... ...


최우석, 신선도10폭병풍 중 세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약간 중간 타입 같은 이런 태점도 있다. 채색을 하지 않은 수묵화에서 그냥 먹으로 까만 점을 두둑두둑 찍기도 한다.


태점은 그림 속 사물의 윤곽선이나 음영을 따라 토핑처럼 얹히며 화면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사실 지금껏 그림을 볼 때 태점을 그리 유심하게 본 적은 없었다. 부수적인 디테일이니까.

그런데 이번 주 칼럼에서 소개한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을 보면서, 이 이끼들이 눈에 새롭게 들어왔다. 특히 장승업의 <홍백매도10폭병풍>에서.


장승업, 19세기, <홍백매도10폭병풍>, 개인 소장


전시에서 만난 이 병풍이 워낙 마음에 깊이 남아, 칼럼에서도 한 문단을 할애해 소개했었다.


19세기 후반 장승업이 그린 <홍백매도 10폭병풍>은 종이 위로 쓱쓱 붓을 움직여 나갔을 화가의 자신만만한 뒷모습이 보이는 듯한 작품이다. 힘차게 뻗어난 매실나무 두 그루에서 나무 우듬지와 둥치는 제하고, 가장 왕성하게 우거진 한가운데를 성큼 비추었다. 큼직한 옹이가 팬 줄기에서 자라나온 굵은 가지와 붉고 흰 매화꽃에서 폭발하는 생명력의 기세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만발한 꽃 사이로 비쳐드는 늦겨울 햇살은 얼마나 고울까. 앞장서 온 봄 향기를 맡는 듯 흥이 저절로 마음을 채운다.


조선의 그림병풍, 아름다운 계절에 영원히 머물다


지엽적인 상상 같아 퇴고하며 뺐지만, 원고 분량이 조금만 더 넉넉했다면 살짝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저 매실나무의 이끼였다. 연두빛 이끼가 흰색과 분홍색 매화꽃, 까만 나무껍질 사이에서 서늘한 생기를 보태고 있는 것이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꽃이 가득 핀 걸 보니 나무에 해가 충분히 닿는 듯 한데도 이끼가 큼직큼직하게 줄기와 가지를 덮었다. 그렇다면 장승업의 이 그림은 매실나무의 북쪽 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 사생화도 아니기에, 태점으로 장식한 걸 두고 이끼 낀 북쪽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좀 억지스러운 생각이다. 그래봐야 그림인데 북쪽이면 어떻고 남쪽이면 어떻냐 싶은 이들에겐 어리석게도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혹시 북쪽으로 난 가지들일까’하는 호기심 한 가닥에 손목을 잡힌 채, 나의 마음은 그림 앞이 아닌 그림 속으로 휙 끌려들어갔다.

나무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이들은 알겠지만, 나무 한 그루에서도 꽃은 반드시 남쪽 가지에서 먼저 핀다. 사람 보폭으론 한 발짝 차이밖에 되지 않는 그 작은 거리 속에서도, 하루 몇 초라도 햇살을 더 가까이 쬔 쪽이 봄빛을 먼저 띠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커다란 나무들에서 북쪽으로 난 가지까지 꽃을 다 피워올린 때는 언제겠는가. 그때야말로 진정한 만개, 곧 절정의 순간인 것이다.

옛 그림에선 햇빛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남쪽을 바라보고 서게 된 우리는 여백에서 빛을 읽을 수 있다. 나무 두 그루를 그릴 때 앞엣것은 진하게, 뒤엣것은 연하게 그리는 기법도, 옅은 새벽 안개를 몰아내며 부쩍부쩍 풍경에 온기를 더하는 이른 봄 햇살의 증거처럼 보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전시와는 무관한 주제 같아 결국 다른 그릇에 덜어 식혀두었다. 다른 걸 식히러 나간 산책길에서 ‘맞아, 그게 있었지’하고 떠올리고 얼른 돌아와 뚜껑을 열고 덥힌 것이 오늘밤의 이 글이다.


문화재는 어렵게 느껴져서 볼 엄두가 안 나는 이들에게 나는 꾸준히 응원을 보내고 싶다. 작품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않아도 괜찮다. 마음대로 보는 것도, 잘 보는 것의 한 방법이라는 걸 올해는 찬찬히 잘 이야기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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