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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Mar 09. 2023

초콜릿케이크 한 조각

케이크가 먹고 싶은데  조각 케이크를 먹고 싶은 게 아니라  홀 케이크의 한 조각을 먹고 싶은 것인 그 느낌 아십니까.  제 삶의 행복과 불행 대개가 그걸 느끼려 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가능할 땐 떳떳함이고 불가능할 땐 허영이 되는 그 마음.
분수를 잊고 싶은 마음.

(2023년 3월 8일)


주변 사람들은 내가 과자를 무척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스물세 살쯤에 알았다.

나는 그걸 먹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갖는 걸 좋아한다고.



어릴 적 그림책에는 '빵과자'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아마 크루아상, 퍼프, 패스트리 같은 비에누아즈리를 적당히 가리킨 말이었지 싶다.


아빠를 따라서 큰 제과점에 갔을 때 "빵과자다!"하고 나비파이를 골랐다.

한입 먹어보고 실망했다.

좀 눅눅한 엄마손파이 맛.

그림책 속에서 본 빵과자는 바삭하면서도 푹신해야 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읽던 얇은 그림책은 글자 수도 많지 않아서,

명작동화 한 편을 압축해서 핵심적인 장면만 추려 전개해놓은 것이었다.

글 어디에도 그림 속 빵과자의 맛이나 식감에 대한 묘사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 빵과자와 케이크의 맛을 나는 알 것 같았다.

그 음식들이 놓여 있는 접시와 테이블,

그 주위에서 웃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얼굴과 의복,

따뜻한 불빛과 벽난로 속 장작들을 보고 알았을 것이다.


달콤하고 고소하고 포근한 맛이라고.



홍대앞에 처음 마카롱 가게가 들어왔을 때

나는 며칠에 한 번씩 거기 들러 마카롱을 여러 개 샀다.

언니가 '사놓고 겨우 한 개 먹을까 말까 하면서 왜 자꾸 사?' 물었을 때

'그냥 이렇게 고르고 사는 게 좋은 건데?'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내 말을 들은 언니는 '그래,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갔다.


글로 쓰고 보니 어쩐지 X세대 같고 이상하지만,

내가 하찮은 허영으로써 뭔가를 해소하고 있다는 걸

언니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나와 원가족이 공유하는 특유의 정서이다.

억압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작은 낭비는 심호흡 같은 것이다.

숨을 오래 참았다가 혹은 숨이 차게 뛰었다가 하는,

호흡을 가라앉히려는 시도.


많이들 이야기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치' 같은 것이다.


언니와 살 때,

우리는 산책을 하다가 가끔 케이크를 샀다.

그때 우리는 심호흡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조각케이크 단면이 마르지 않게 붙여놓는 비닐띠를 싫어한다.

그걸 떼어낼 때마다,

한참 전에 남이 잘라놓은 조각케이크 같은 것들을

삶에서 감수해야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떼어내면 손이 끈적끈적해지고,

어쩐지 비닐띠를 떼기 전보다 초라해보이는 것들.


내 것이 아니라 내 몫만이 허용되는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그 정도가 내 분수라고 가르쳤다.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빵과자를 그리워하며 자란 건

그 빵과자가 있는 세계를 그리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책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담겨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건 동경이 아니라 선망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그 빵과자들이 놓인 따뜻하고 즐거운 방이 있고,

그 방에서 어른들은 보라색 와인을 마시고

어린이들은 우유와 홍차를 마시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거기 없지만.


어디에도 짓눌리지 않을 크루아상,

내 마음대로 잘라 먹는 케이크,

지금 당장 먹지 않아도 되는 마들렌 같은 걸 손에 넣을 때마다

분수를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다.



작년 생일에 투썸플레이스 초콜릿케이크 교환권을 선물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걸 언제 쓰나 하는 생각을 반년 가까이 하고 있다.

커피나 물건으로 바꾸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초콜릿케이크 교환권은 왠지 초콜릿케이크로만 바꾸고 싶다.


최근엔 하루에 세 번씩 교환권 생각을 했다.


아마 곧 초콜릿케이크 한 판을 자르는 날이 오겠지.

아무 날도 아닌데 홀케이크를 먹자고 들고 오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아마 '정말 디저트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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