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채워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 주의를 계승한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자신은 프로이트의 글을 꼼꼼히 읽은 것 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철학은 프로이트 세계관을 한단계 확장시킨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철학계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정신분석학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유명하다.
워낙 철학사적으로 해석하기 어렵고 난해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기도 한다.
라캉을 이해하려면 프로이트의 기본 개념들도 이해해야 한다.
프로이트의 기본 개념과 비교하자면
- 프로이트의 개념에는 크게
1) 원초아
2) 초자아
3) 자아
가 있다. 원초아는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폭력적 충동, 부도덕한 행동, 이기적 욕구 같은 것들이다.
반면 초자아는 성장하면서 학습되고 설립된 도덕적 기준 잣대 같은 것들이다.
프로이트는 이 사이에 자아가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원초아가 나오려고 하며 자아가 그 부분을 무의식으로 누르기도 하면서, 초자아가 너무 강해지면 조금 느슨하게 만들면서. 건강한 사람은 이 자아가 튼튼해서 원초아와 초자아의 균형을 잘 맞추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라캉은 이 세가지 개념을 다르게 해석하여
1) 상상계
2) 상징계
3) 실재계
의 세가지로 구분했다.
이 세가지의 개념을 꼼꼼히 보면 프로이트의 개념은 인간의 내면에 나오는 여러가지 자아를 의미한다면
라캉의 개념은 그 세가지가 나오는 장 , 장소 내지는 바탕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사람의 생애로 이 세가지 개념을 정리하면
아기는 태어나서 나와 나 아닌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기는 엄마와 내가 다르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동일시 하는데 이때는 원초아 (먹고, 자는 것 등의 본능)만 있지 자아라는 개념은 없는 시기이다.
이러다가 아기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가 되면 거울을 보며 자신의 독립성을 알게 된다.
이 단계를 거울단계라고 부른다. 이 거울은 진짜 거울일 수도 있고 자아를 인지하게 하는 매개체일 수 있다.
아기는 이때 자신의 감각은 파편화 되어 있는 반면에 거울속의 자신은 완벽하다고 느낀다.
이런 거울속의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화하면서 이 이미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른다.
나르시시즘은 비단 아이에게만 있지 않고 정확한 과정을 거치지 못했을 때 성인에도 그 잔재가 남아 특정한 사람은 세게 나타나기도 한다.
상상계는 이러한 이미지의 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상상계에서는 아이는 엄마와 나 2인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하지만 상징계는 여기에 아빠라는 존재가 나타난다. 여기서 아이는 엄마, 아빠 나 3인 체제로 들어오게 된다. 아버지는 아이가 엄마라는 욕망을 버리고 법과 규칙의 세계에 들어오길 강요한다.
이러한 법과 원칙의 세계가 상징계이다. 상징계는 법과 원칙의 세계이자 언어의 세계라고도 볼 수 있다.
언어의 세계는 어떤 개념을 명확히 하기로 한 모종의 약속이다.
헬렌켈러의 예시를 들어보자. 헬렌켈러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헬렌켈러에게 촉수화를(손으로 촉각으로 느껴서 언어를 이해하는 )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과정이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어떤 사물에 대한 개념이란 것이 생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가 촉수화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이 언어를 마스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손의 감각으로 개념을 학습하고 설립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순간이 헬렌켈러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상징계에서는 규칙이 굉장히 중요하다. 상징계로 넘어갔다는 것은 이러한 규칙을 따르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상징계에서는 이렇듯 언어와 규칙들이 중요하기 때문에 더이상 주인공이 아기가 아니다. 언어가 주인인 세상에 살게 되는 것이다. 아기는 이제 언어가 만들어놓은 의미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언어가 인간을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상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난번에 한 소쉬르의 언어 철학과도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기표와 기의
이러한 상징계의 세상을 라캉은 기표가 계속 바꿔치기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특정 단어를 우리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라캉에 따르면 언어의 기표가 바꿔치기 되면서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세상이라고 했다.즉 주체가 '나'가 아닌' 언어'라는 것이다.
상상계는 이미지의 세계,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라면 실재계는 그 너머의 세상이다. 실제로 화가는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를 그림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하지만 간혹, 아니 현대미술에서 많은 수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기도 한다.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자신의 생각, 개념, 감정등을 언어나 이미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처럼 언어나 이미지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언어와 이미지를 너머선 세계를 실재계라고 말한다.
상상계가 이미지의 세계, 상징계가 언어와 규칙의 세계라면 실재계는 그 너머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기본 개념으로 욕구, 요구, 욕망을 비교해 보겠다.
우선 1) 욕구 2) 요구 3) 욕망 의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1) 욕구는 식욕, 수면욕, 배설욕 같은 기본 욕구이다
2)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아기는 울음으로 배고픔을 표현하거나, 재워달라고 울거나 , 기저귀가 찝찝하면 갈아달라고 우는 등 표현을 한다. 이것을 요구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아기가 욕구를 느끼지 않아도 무작정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불편할 때만 울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자신을 봐달라고, 즉 자신에게 무한정 사랑을 요구하고 그때그때 욕구를 채워달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라캉은 사람들이 이러한 욕망을 다양한데에서 채우려고 한다고 말했다. 차를 많이 가지면, 돈을 많이 가지면, 더 많은 여자나 애인을 만나면, 지식을 많이 쌓으면 채워진다고 착각한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라캉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을 추구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다시 아기와 엄마의 개념으로 돌아간다.
아기는 엄마의 욕망이 되길 원한다. 엄마가 결핍하고 있는 것을 자신이 채워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엄마의 말대로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훌륭한 직업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타자 (다른사람)의 욕망을 욕망한 것이다. 이러한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명상을 하거나 수도승이 되거나 하는 것도 사실은 타자의 욕망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때문이라고 라캉은 말한다.
-프로이트는 알다 시피 성적 욕망으로 이를 설명한다. 아기는 4세정도가 되면 엄마를 성적 욕망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강력한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적대감을 느끼지만 더 저항하게 되면 거세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래서 아이는 어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며 엄마에 대한 욕망은 무의식으로 밀어 넣는다. 이러한 양가감정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닮아 가려는 것) 이것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 부른다.
-라캉은 상상계의 세계에서 아기와 엄마 둘밖에 없다. 이세계에서 엄마의 욕망이 되기를 원한다.
엄마의 욕망을 라캉은 팔루스라고 정의한다. 아기는 엄마의 팔루스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여기는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 엄마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을 팔루스로, 아버지라는 존재를 법과 규율들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상징적 거세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때 아기는 언어라고 하는 상징계로 들어가게 된다. 법과 규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체가 형성된다고 이야기한다. 라캉의 해석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엄마에 대한 욕망의 자리에 상징계가 채워지면서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엄마에 대한 욕망의 세계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영원히 결핍의 상태로 남게 된다. 그래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결핍의 상태에 놓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성적인 갈등으로 , 라캉은 언어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차이점을 보인다.
이처럼 욕망은 본질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은 결핍을 동반하고 이것은 절대로 채워 질 수 없다는 것이 라캉의 이론이다. 이 욕망이 완벽하게 채워지는 것은 죽음과 가깝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주이상스란 개념이 나오는데 주이상스란 일정 쾌락을 넘어서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죽음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주이상스를 어느정도 억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들을 의미한다. 폭음을 하거나 마약을 하거나 등등 자신을 파괴에 이르게 하는 것고 동시에 일정 쾌락을 넘어서려는 추구를 주이상스라 명한다.
앞서 말했던 것 처럼 라캉은 철학 뿐 아니라 정신분석학에도 큰 획을 그었다.
이러한 개념들을 기반으로
라캉이 정의하는
1) 정신병은 아버지의 기능 (규제와 법과 질서 언어 등을 총칭하는 ) 부권의 상실을 의미하며
상상계의 것들을 꺼내오는 것이며 이상한 것들에 대해 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충동들이 제한 없이 행위하는 상태를 정신병이라고 정의한다.
2) 신경증은 이와 반대로 부권이 너무 강하게 자리하는 것을 의미하며 확실성보다는 의심에 가깝다.충동이 상당부분 금지된 경우로 억압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신경증 안에는 크게
주체와 타자의 개념으로 나눌 수 있는데
1. 히스테리- 불만족한 욕망이며 자신보다 타자를 강조한다. 타인을 (주로 사랑하는 대상 파트너) 자신이 그인것 처럼 욕망한다. 히스테리 환자는 타인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길 원하며 자신과 타자의 욕망을 구분하지 않는다.
2. 강박증-불가능한 욕망으로 고의적으로 무의식을 무시한다. 계속 생각하는 사유에 머물기를 원한다. 타자에 속하기 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해서 환상의 무언가를 갈망하고 설정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에 이른다. 강박증자는 일상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절한다.
이 있다.
이처럼 주체와 타자와의 욕망, 주이상스들이 작용하면서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어쩌면 인간이라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겪으면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욕망을
우리는 과하게 누르기도 하면서, 혹은 너무 많이 발현하기도 하면서 늘 결핍을 겪으며 살아간다.
현대 사회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듯 많은 상업 문화에서 내가 진짜 갈망하지 않는 것을 갈망하게 한다.
하지만 좋은 차로도, 많은 부로도, 많은 사람으로도 , 많은 지식으로도
필연적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이 욕망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적절하게 원초아와 초자아의 균형을 맞추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은 정신분석학의 대가라고 해서 시작한 이 작업이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많은 지적 갈망도 어쩌면 욕망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며. 라캉은 이렇게 보내주는 걸로.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