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전반 6개월간 6개 도시에서 한달살이를 했다. 6개월간 해외살이를 하다 보니 도시의 안락함에 길들여져 나태해지려 한다. 매일 두세 시간씩 걸었지만, 체력은 전과 같지 않고 도시의 익숙한 풍경과 단순한 일상은 삶의 활력을 떨어뜨렸다. 빡세고 불편한 여행으로 몸과 마음을 조이고 긴장시키고 싶었다. 여행 카페에서 진행하는 20일간의 차마고도 배낭여행을 신청했다. 2025.6.26 비엔나에서 돌아오자 마자 시차적응도 안된 상태로 차마고도로 향했다.
2007년 KBS 다큐멘터리에서 본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의 풍경은 언젠가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작년에 실크로드를 여행했고, 이번에는 차마고도 차례이다. 이번 여행은 오지 배낭여행이라 숙소와 이동 수단이 열악하고 식사도 직접 해결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안이해진 몸과 마음을 다시 조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여행은 없을 것 같았다.
차마고도는 중국과 티베트를 잇는 고대 무역로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무역 네트워크이다.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환하던 주요 통로로, 윈난성에서 시작하는 경로와 쓰촨 성에서 시작하는 천장북로, 천장남로 등 세 가지 경로가 있다. 세 곳 모두 해발 4,000m 전후의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지나가는 험준한 길이다.
이번 여행은 쓰촨 성 청두를 출발해 천장북로를 거쳐 티베트 국경까지 갔다가, 다시 천장남로를 통해 청두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차마고도의 최종 목적지인 티베트 라싸까지 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이 경로는 천장북로의 험준한 풍경과 천장남로의 수려한 풍경을 모두 경험할 수 있어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총 12명의 일행 중 4명은 이미 파키스탄 오지 여행을 마치고 청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은 79세 여성으로, 20일간의 오지 여행을 마치고 곧바로 20일간의 차마고도 여정에 합류했다. 그분의 지치지 않는 열정을 보면서 나는 한없이 겸손해졌다.
인천에서 만난 8명의 일행은 상견례를 마치고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장기간의 여행이라 대부분 60대 퇴직자들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함께 팀을 이루어 여행하는 만큼, 첫인상이 중요하다. 룸메이트를 잘 만나야 여행 내내 마음고생 없이 즐거운 여정을 보낼 수 있다. 다행히 작년 여행을 함께했던 퇴직 교사분께 부탁해 룸메이트가 되어 여행기간 내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청두는 이번 차마고도 여정의 실질적인 시작점이다. 4,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이 도시는 풍부한 문화유산과 현대적인 활력이 공존한다. 삼국시대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수도였다. 시내에 있는 무후사에는 유비와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과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등신대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어서 과거 재밌게 읽었던 삼국지를 생각나게 한다.
또한 당나라 시인 두보가 머물렀던 두보초당이 인상적이다. 주변이 거대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백을 비롯한 유명 시인들의 조각상과 시가 전시되어 있어 중국 문학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서울의 인사동과 비슷한 콴자이샹쯔에서는 청나라 시절의 고즈넉한 골목길 분위기를 만끽하고, 진리거리에서는 삼국지 시대의 저잣거리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미식의 도시'로 불리는 청두답게, 매콤하고 얼얼한 쓰촨 요리를 맛보며 험난한 여정의 시작을 준비했다.
아침 일찍 차량 두 대에 나눠 타고 첫 목적지인 마얼캉으로 향했다. 여행 내내 6~8인승 차 두 대로 이동해야 하는 오지 여행의 특성상, 탑승한 좌석의 멤버들이 여행의 동반자가 된다. 모두 서로를 배려하며 좌석을 양보하는 모습에서 여행에 진심인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얼캉은 청두에서 더거로 이어지는 천장북로의 핵심 거점이다. 해발 500m에서 3,200m로 고도가 급격히 높아지면서 귀가 멍해지고 배가 부풀어 오르는 '고산증'의 전조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높은 고도로 인해 날씨가 선선해져서, 며칠 전까지 서울의 폭염에 시달렸던 것에 비하면 낙원이다.
인구 5만 명의 작은 도시지만, 거대한 상가 건물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티베트족을 회유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대규모 도시 계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트에는 한국 라면, 과자, 소주가 진열되어 있어 반가웠는데, 3,000m가 넘는 고도 탓인지 과자 봉지가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아침 7시에 조식을 먹고 8시부터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마얼캉 인근의 창열사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중요한 사원으로, 고도 4,000m의 산에 건설되고 있는 거대한 불상이 압도적이다. 스님들과 함께 점심 공양을 하며 티베트 불교의 일상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티베트 불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그들의 삶 자체이다. 옴마니반메흠을 외우고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마을 입구마다 세워진 백탑사에서 티베트인의 강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다.
창열사를 떠나 관음교진으로 향하는 길은 험준한 대협곡과 고산 지형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관음교진에 도착해 방문한 관음사는 7세기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원으로, 4,000m가 넘는 산 정상에 위치한다. 다채로운 벽화와 불상, 탕카로 장식된 사원에서 내려다보는 협곡과 산들의 파노라마는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저녁에는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강강술래 비슷한 민속춤을 추고 있다. 유튜브에서만 보던 티베트의 귀좡춤이다. 이후 여행했던 모든 도시에서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함께 춤추고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원래 계획은 티베트 최대 불교 학교인 써다 오명불 학원 방문이었다. 그러나 중국 공안의 외국인 출입 통제로 인해 학원 진입이 불가능하다. 다음 목적지인 루후오로 가기로 했으나 이마저도 운전사들이 공안을 두려워해 검문소를 피해 샛길로 빙빙 돌아 루후오로 향했다.
샛길로 돌아가는 경로는 길은 험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아름답다. 유채꽃이 만발한 계곡길을 지나던 중, 차량 한 대가 고장 났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는 우리 일행을 보더니 티베트 아낙이 우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작은 절처럼 부처님이 모셔진 전통 가옥에서 차와 빵을 대접받으며 티베트 사람들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운전사는 오후 6시에 경찰이 퇴근한 다음에 검문소를 지나가야 한다면서, 길가에서 한 시간 넘게 경찰이 퇴근하기를 기다린다. 외국인 출입이 불법이라도 검문소 운영 시간이 끝나면 괜찮다는 말에 쓴웃음이 나왔지만, 결국 느지막이 루후오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오전에 루후오의 슈링쯔 사원을 방문했다. 이미 여러 사원을 둘러본 탓인지, 아름답고 웅장한 사원이 주는 감동이 처음 같지는 않다. 유럽 여행 시 성당에 대한 호기심이 점차 사라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앞으로도 계속 사원을 방문할 텐데, 이 아름다움에 무뎌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원 방문 후 다음 목적지인 간쯔로 향했다. 루후오에서 간쯔까지는 차마고도의 중요한 구간 중 하나로, 드넓은 고원 초원 지대가 펼쳐진다. 푸른 초원과 야생화, 평화롭게 풀을 뜯는 야크 떼의 모습은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가는 길에 만난 아름다운 호수에서 잠시 쉬어가며 고원의 절경을 눈에 담았다.
간쯔는 차마고도의 중요한 교역 중심지이자 티베트족 자치주의 중심 도시이다. 해발 3,400m에 위치한 고산 협곡 지형으로, 수많은 티베트 불교 사원들이 자리한다. 시내에 있는 한인사와 간쯔사를 방문했을 때, 이전과 달리 중국 공안들이 우리 일행을 감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티베트 분리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것을 우려해 사원과 외국인을 감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간쯔사에서 멀리 보이는 백탑사까지 두세 시간을 걸으며 티베트 평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거대한 크기의 백탑사 내부에는 수십 개의 방에 수많은 부처, 보살, 각종 수호신 수백 개가 안치되어 있다. 혼자서 백탑사 내부를 돌아다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출구를 찾느라 부처, 보살, 수호신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촌극을 벌였다. 무서운 형상의 수호신들 사이를 돌아다니니 어린 시절 절입구의 사천왕 상을 보고 무서워했던 공포가 밀려온다. 내가 지은 죄가 많은가?
간쯔 재래시장을 방문하여 저렴한 점심을 먹고, 전통 수공예품을 구경했다. 과거 차마고도를 걸었던 마방들이 이곳에서 물건을 사고팔면서 다음 여정을 준비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주류판매점에서는 커다란 술독에서 직접 퍼주는 독한 중국 술을 맛본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아침 일찍 티베트 국경에 접한 도시, 더거로 향했다. 더거는 천장북로의 마지막 여정이다. 이 길은 티베트 고원의 장엄하고 원시적인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해발 5,000m가 넘는 고개길을 넘어야 했지만, 지금은 터널 덕분에 편하게 갈 수 있다. 모택동의 홍군이 만리장정 중 가장 처절한 고난을 겪었던 곳이라는 이야기에, 과거 마방들과 홍군의 고통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동 중에 신루하이 자연보호구역에 있는 호수에서 트레킹을 했다. 해발 4,500m에 위치한 호수 주변을 걷자 작은 언덕에도 숨이 턱턱 막혔지만, 6,000m 높이의 추얼산에서 흘러내린 빙하호의 아름다움이 힘든 것을 잊게 한다. 차가운 빙하호수에 물고기가 많이 보인다. 물고기들이 사람구경을 못해서 인지 우리가 걷는 물가 쪽으로 때를 지어 몰려오는 것이 재미있다.
더거로 가는 길은 깊은 협곡이 이어진다. 깎아지른 절벽 곳곳에 조각된 정밀하고 예술적인 부처님 석불들이 시선을 사로잡으며 티베트 불교 예술의 높은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담배 냄새가 너무 심해 방을 옮겨야 했다. 중국인들은 호텔방에서 흡연을 해서 방마다 담배냄새가 나는데 이번 방은 정도가 심해서 견디기 어렵다. 해가 지자 더거의 광장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민속춤을 준다. 우리 일행들도 현지인들과 어울려 함께 춤을 추며 광장을 돌았다.
9일간의 여정은 청두에서 더거까지, 천장북로를 따라 펼쳐진 길이었다. 만년설산, 빙하 호수, 드넓은 목초지와 깊은 협곡 등 다채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차를 타고 지났기에 아름다운 풍광만 기억하지만, 이 험난한 길을 지나갔을 옛 마방들의 고통을 상상하며 잠시 숙연해진다.
천장북로길의 여정을 마치고 다음 날부터는 다시 더거를 떠나 간쯔를 거쳐 리탕, 바탕, 그리고 청두로 돌아가는 천장남로의 길을 여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