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여행자들 사이에서 '힙한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는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한 달 살이를 하고 있다. 조지아는 한국인에게 무비자 365일 체류를 허용하고 있어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88 올림픽 시절의 유럽?
여러 나라를 다녀보니, 그 나라의 국민 소득이 도시의 풍경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항 시설, 도로, 건물, 심지어 길거리 사람들의 옷차림까지 국민 소득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2024년 말 기준 조지아의 국민 소득은 약 7,000달러로 태국과 비슷한 수준이며, 한국의 88 올림픽 시절과 비슷하다. 유럽이라고 하면 으레 부유한 나라를 떠올렸던 베이비부머 세대인 내게, 유럽 국가가 동남아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사실은 꽤나 생경한 경험이다.
트빌리시는 유럽과 아시아 문화가 독특하게 뒤섞인 도시다. 1,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구도심에는 중세 시대부터 이어진 좁은 골목길과 전통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굳이 한국과 비교하자면, 고풍스러운 한옥이 가득한 전주 같은 느낌이다.
나만의 완벽한 아지트 찾기
트빌리시에 도착한 첫날, 숙소 주변을 탐색하며 한 달 살이의 큰 그림을 그렸다. 숙소 자체는 평범했지만, 위치만큼은 '나만의 한 달 살이' 콘셉트에 완벽히 부합했다. 도심과 가깝고 주변에 마트, 교통, 카페가 있으며 운동 겸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가까웠다.
구도심 중심부라 웬만한 유적지는 걸어서 다닐 수 있고, 대형마트인 '까르푸'가 가까워 장보기도 편하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건 노트북 작업 공간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저렴한 물가와 무비자 정책 덕분에 트빌리시는 최근 전 세계 디지털 노매드들의 성지로 떠올랐다. 덕분에 콘센트가 넉넉한 카페가 많았고, 심지어 까르푸 푸드코트에도 노트북 가능한 좌석이 100개가 넘으며 곳곳에 콘센트가 설치되어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누룽지와 과일로 간단히 식사한 후, 10분 거리의 까르푸로 '출근'하는 루틴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한참 노트북 작업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서너 시쯤 까르푸에서 장을 본 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고, 해 질 녘이면 관광 겸 운동 삼아 시내 구석구석을 걷는다. 좁은 구도심은 가로세로 2km 정도라 매일 한 바퀴씩 둘러보기 좋았다.
낯선 풍경, 익숙한 정서
트빌리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쿠라강과 병풍처럼 도시를 감싼 산들은 아름답지만,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산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 강수량이 적고 토양이 척박해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는 환경 때문이라고 한다. 나무가 꽉 차있는 한국의 산야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구도심은 고풍스러운 건물들로 가득하지만,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건물들이 눈에 띈다. 삼위일체 대성당이 있는 동쪽 산비탈을 오르다 보면 열악한 주거 환경의 달동네가 이어진다. 국민소득 7000불 국가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최근 조지아가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는 만큼, 이 모습도 머지않아 한국의 달동네처럼 깔끔하게 변할 것이다.
구소련의 흔적들
트빌리시를 걷다 보면 이곳이 과거 구소련 국가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도시 곳곳의 공원에는 사회주의 체제를 선전하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세워진 조각상과 동상들이 많다. 소련체제가 무너졌어도 동상을 세우는 문화는 지속되고 있는지 시내 곳곳에 멋들어진 조각상들이 설치되어 있다.
사람들의 서툰 서비스 정신도 구소련의 잔재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택시 기사는 시종일관 무표정했고, 식당이나 가게 직원들은 마치 빌려준 돈을 받는 듯 무뚝뚝했다. 혹시 내가 실수라도 했나 걱정될 정도였다. 경쟁이 없던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손님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서로를 감시했던 과거 때문에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몸에 배어 있어서라고 한다. 속정은 깊다고 하지만,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시내에 꽃집이 유난히 많은 것도 흥미로운 구소련의 흔적이다. 사회주의 시대에는 값비싼 선물이 귀했고, 저렴하면서도 기분을 좋게 해주는 꽃이 특별한 날뿐만 아니라 감사를 표현하는 용도로 애용되었다고 한다. 지난달 한 달 살이 했던 몽골 울란바토르에도 꽃집이 많았는데, 이런 문화적 배경이 비슷해서였나 보다.
악기연주 실력이 뛰어난 것도 구소련의 영향이다. 구소련에서는 음악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국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여 어린 시절부터 음악 교육을 강조했다. 이 때문인지 구도심 골목 식당에서는 밤마다 악기 연주와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길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연주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조지아에서 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고 한다. 결혼식이나 축제 등 거의 모든 모임에 노래와 연주가 빠지지 않는다고 하니, 허름한 식당 앞에서도 멋진 라이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K-컬처가 만든 특별한 경험
사람들이 불친절해 보이다가도, 'Korea'라는 단어에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는 경험은 정말 놀라웠다. 버스 카드 파는 곳을 묻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묻던 행인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딸이 BTS와 K-pop을 너무 좋아한다"며 자신이 쓰던 버스 카드를 선뜻 건넸다. 10라리(약 5,000원)나 들어있는 카드였지만, 돈을 주겠다는 내게 오히려 한국 사람을 도와줄 수 있어 기쁘다며 한사코 받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경험은 조지아 정교회에서였다. 신부님이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Korea'라고 답하자, 반갑게 "안녕하세요"라고 하더니 나를 신부님 대기실로 안내했다. 와인을 한 병 가져와 따라주며 함께 건배했고, 한 병을 다 비운 후에는 내 머리에 입을 맞추며 축복까지 해주셨다. 한국, 신부님, 와인, 축복의 조합이 조금 엉뚱했지만, 내 추측으로는 신부님이 미사주로 쓸 와인을 한 잔 하고 싶어 마침 구경 온 나를 술친구 삼으신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부님이 한국손님을 극진하게 환영하는 의미에서 성스러운 미사주로 대접하고 축복까지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트빌리시의 낮과 밤
'출근'과 '묵언수행'으로 시작하는 낮의 일정이 끝나면, 밤의 트빌리시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변한다. 특히 트빌리시의 명물인 평화의 다리와 다리 끝에 이어진 시민 공원은 밤이 되면 더욱 활기로 가득 찬다. 이곳저곳에서 버스킹 공연이 펼쳐지고, 흥겨운 음악에 맞춰 관광객들의 즉흥적인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평화의 다리 좌우로 이어진 골목길에는 술 한잔에 얼큰해진 사람들로 들뜬 분위기가 이어진다. 취기가 오른 여행객들은 산책하는 나에게도 거리낌 없이 하이파이브를 건네고 말을 건다. 하루 종일 말할 상대 없이 카페에 앉아 '묵언수행'을 하던 나도 이곳에서는 행인들과 큰 소리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해방감을 느낀다. 마치 '바람난 처녀'처럼 나는 밤마다 구시가지의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3개월 전 부다페스트에서는 밤마다 다뉴브강변을 걸으며 현란한 야경을 감상했고 트빌리시에서는 밤마다 구도시 골목길을 누비면서 다양한 모습의 관광객들을 구경하고 있다.
물가는 저렴하지만은 않다
조지아가 물가가 저렴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근 물가가 급등했는지 생각보다 아주 싸지는 않았다. 소득 수준은 한국의 20% 정도인데, 마트 물가는 한국의 70~80% 수준이고, 외식비는 한국 동네 식당과 비슷한 1만~1만 5천 원 정도이다. 그나마 와인, 숙소비, 교통비 등이 한국의 절반 이하라서 저렴한 물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시니어들의 힙한 여행 가이드
지금까지 15번의 한 달 살이를 했지만, 트빌리시에서의 한 달은 특별하다. 친구들이 방문해 12일간 조지아 산악 트레킹을 함께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 달 살이의 콘셉트인 '유유자적 현지인처럼 살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내가 먼저 와서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친구들을 안내해야 하는 역할이기에 이것저것 알아보고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친구들과 함께할 카즈베기와 메스티아 트레킹 계획을 세우는 일도 내 몫이다. 두 곳은 '코카서스의 알프스'라 불릴 만큼 뛰어난 산세를 자랑한다. 직선거리는 150km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10시간이나 운전해야 하는 험한 길이다. 일행 모두 두 곳을 걸어보고 싶어 해 3일씩 머물고, 이동 중간에 하루 이틀 쉬어가는 일정으로 계획을 짰다.
숙소는 2일 이상 머무는 곳은 에어비앤비에서 독채를, 하루만 머무는 곳은 호텔을 예약했다. 70세 가까운 시니어들이라 기사 딸린 미니밴을 렌트하기로 했는데, 온라인으로 예약하려니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 현지에서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현지에 도착해 보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서울에서 예약해 뒀던 호텔에 가보니 사진과 달리 시설이 열악해 예약을 취소하고 온라인 가격보다 30%나 저렴하게 다른 호텔을 예약할 수 있었다. 차량도 예약했던 차의 트렁크가 너무 작다. 현지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미니밴 운전사와 협상하니, 온라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10일간 렌트할 수 있었다. 은퇴 후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현지에 먼저 와서 여행 계획을 세우면 훨씬 알차고 저렴한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트빌리시, 한 달 살기 참 좋은 도시
한주를 지내보니 트빌리시는 한 달 살기에 참 좋은 도시다. 유럽풍이면서도 아시아적인 분위기가 섞여 있어 정감이 느껴진다. 한국인에 대한 인식도 좋고, 물가가 합리적이라 생활비 부담이 적다. 신선한 식재료, 다양한 외식 메뉴, 저렴한 교통비와 숙박비가 모두 만족스럽다. 디지털 노매드의 성지답게 노트북 작업 공간도 풍부하다.
도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생활에 필요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도시 곳곳에 공원과 호수, 식물원이 있어 도시 생활과 자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강변을 따라 걷거나 구도심의 좁은 골목길을 누비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트빌리시에서의 한 달은 친구들과의 트레킹이라는 특별한 이벤트 덕분에 유유자적한 휴식보다는 활기차고 분주한 경험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