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초원을 달려보자.
처음에 계획을 세우면서 비에이 역사를 기준으로 뒤편(서북쪽)은 자전거를 대여해서 돌아다녀보자고 마음먹었다. 원래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사방이 오픈된 탈것에 최적화된 곳이 비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비수기라 렌탈이 가능할지 긴가민가 했는데 마침 역 바로 앞의 편의점을 운영하는 곳에서 자전거 렌탈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언덕이 많은 곳이라 그냥 자전거로는 조금 힘에 부칠 것 같았는데 마침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가 있어서 그것을 빌리기로 했다. 시간당 600엔이었고 2시간을 렌탈했다. 선금을 내고 여권이라도 맡겨야 하나 쭈뼛대고 있는데 그냥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시란다. 아니 외지에서 온 사람을 뭘 믿고 이리 자전거를 빌려주는 걸까? 살면서 누굴 속이려 한 적은 없지만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게 어려운 세상이기도 한데, 흔쾌한 믿음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일반 자전거나 킥보드, 스쿠터같은 것은 타봤지만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는 처음이었다. 사실 빌리면서 킥보드 같은 완전 전동 시스템을 생각했는지라 배터리를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2시간이나 탈 수 있는 킥보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껏 배터리와 모터가 달려 무거운 전동 자전거를 빌렸는데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그건 그냥 무거운 자전거일 뿐이니까. 근데 주인장이 배터리 떨어질 일 없으니 편하게 타시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는 완충 시 대여섯 시간은 너끈하게 주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2시간 빌려놓고 배터리를 걱정하니 기우였을 수밖에.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는 먼저 전원을 올리고 페달을 밟아야 비로소 모터가 작동하여 힘을 추가로 실어주는 방식이었다. 내가 밟지 않으면 모터도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평지에서 속도가 많이 나오게는 하기 힘들지만 언덕길에서는 확실하게 힘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언덕을 평지처럼 달릴 수 있어졌다랄까? 이것은 마치 세발자전거를 탈 때 뒤에서 아버지가 밀어주시는 그런 기분이었다. 자전거 하나에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한쪽 귀에만 꽂고(양쪽 다 꽂으면 주변 소리를 못 듣는 위험이 있어서) 구글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여 제부루의 언덕을 향해 달렸다.
비에이 들판으로 가기 직전에 산업도로를 한번 건너야 했는데 커다란 트럭이 쌩쌩 달려서 건널 타이밍을 쉽게 잡을 수 없었다. 여행에서 모험도 좋지만 안전이 가장 최우선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 좌우를 살펴 한 순간 빠르게 건넜다. 이후로는 이렇게 차와 맞짱뜰 일은 없었고 오가며 딱 한 번씩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길을 건너 제루부의 언덕에 도착했을 때 놀랍게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비수기라지만 이 정도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없었다. 건물이고 들판이고 주차장이고 텅텅 비어있었다. 자전거를 주차장에 대놓으면서 약간 멋쩍은 기분이었지만 자리차지한다고 누가 뭐라 할 이유도 사람도 없었다.
제루부의 언덕은 여름철에 갖가지 꽃을 동일한 폭으로 길게 심어 마치 무지개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입장료가 없는데 꽃밭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너무 궁금했다. 꽃을 수확하여 향수회사에 원료로 납품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장소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카트를 유료대여하니까 거기서 수입이 나는 걸까?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는데 거기서 나온 수입으로? 그런 궁금증을 가득 안고 방문했지만 역시나 답을 찾을 순 없었다. 사람이 있으면 물어볼까 싶었는데 코빼기도 볼 수 없었으니까. 내가 방문했을 땐 꽃은 대부분 정리가 되어 있어 흑갈색 토양이 너른 땅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광활함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곳이었다. 멀리 설산과 단풍들을 조망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루부는 참 좋은 곳이었다. 제루부는 카'제'(바람), 카오'루'(냄새), 아소'부'(놀다)의 뒷글자를 모은 것으로 '상쾌한 바람 향기가 있는 언덕에서 모두 즐겁게 놀기'를 캐치프레이즈로 하고 있었다. 꽃이 없어 냄새는 없었지만 제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꾸 제부루 언덕이라고 기억했는데 유래를 조사하고 난 뒤부터는 똑바로 읽을 수 있었다. (인터넷에도 제부루 언덕이라고 치면 제루부언덕을 다룬 글이 많다.)
참고로 제루부의 언덕 홈페이지에서는 24시간 작동하는 카메라 영상을 제공하고 있어 현재 상황이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셔도 좋을 것 같다.
http://zelb.plala.jp/viewer/live/index.html?lang=ja
다음 목적지로는 '켄과 메리의 나무'가 가장 가까워서 그곳을 설정하고 다시 자전거를 달렸다. 내 생각에 비에이에서 이런 나무들을 찾아가서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나무를 찾아가는 과정의 풍경이 너무나 좋았다. 비에이까지 올 수 있는 분이라면(+겨울이라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버스나 택시투어를 이용하기보다는 자전거를 렌탈해보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바람과 하늘과 들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라는 생각이다.
켄과 메리의 나무는 닛산 스카이라인 자동차의 광고에 등장한 사시나무다. 평평한 들판에 유난히 홀로 솟구친 자태가 광고인이 보기에 매력적이었던 듯하다. 그 광고에 등장한 두 주인공이 켄과 메리였는데 이 나무가 그 이름을 물려받은 셈이다. 광고가 제작된 것이 1970년대이니까 나무의 나이는 최소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도 놀랍지만 50년 전의 광고 덕분에 아직까지도 관광지로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놀랐다. 별 것 아닌 것에도 이야기가 녹아들어 가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일본의 여러 관광지에서 느끼곤 한다. 이야기는 실제로 풍경 자체에서 받는 느낌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요소다.
다음 목적지로 세븐스타나무를 설정하고 이동하는 중에 풀밭에서 귀 끝이 까맣고 꼬리가 복슬복슬한 생명체와 조우했다. 순간 강아지인가 싶었다가 목줄이 없어 야생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자전거를 세우고 카메라를 주섬주섬 꺼내며 조심스레 살펴보니 야생의 여우였다. 난생처음 본 야생의 여우라 나에게 달려오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나에겐 전동 어시스트 자전거가 있었으므로 언제든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호기심이 훨씬 컸다. 급한 마음에 우선 셔터를 눌렀는데 여우가 아니라 앞에 있던 풀떼기에 초점이 잡혔다. 허둥대며 몇 번을 더 찍고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망원렌즈를 꺼내는 찰나 녀석이 나를 알아차렸다.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보더니 기다려달라는 나의 염원을 무시하고 냅다 반대쪽 수풀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높이가 있는 덤불을 껑충 넘어 사라졌다.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참 귀여운 생물이었다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봤더니 홋카이도에서 종종 목격되고는 하는 북방여우였다. 보통 눈 덮인 도로가에서 총총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곤 하는 듯했다. 사람들이 음식을 주거나 하는 경우도 있어서 가끔 사람을 따라오기도 한다는데 야생성을 무시해선 안되고 병원균을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으므로 만나더라도 멀리서 보기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븐스타 나무로 향하면서 혹시나 여우를 한번 더 볼 수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에 수풀 쪽을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볼 수 없었다. 아예 못 보는 사람도 있으니 그런 분들보다야 운이 좋았다 하겠지만 너무 감질나게 봤던지라 한번 제대로 보고 싶은 욕망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세븐스타나무에 도착했다.
언덕을 한참 올라 조금 땀이 날 즈음 세븐스타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1976년 세븐스타 담배의 패키지에 들어가면서 나무의 이름이 결정되었다. 광고나 패키지에 넣는 사진은 전문가들이 심사숙고 끝에 고른 멋진 장소일 것이므로 보통 이런 유래를 가진 곳의 풍경은 기본 이상 하는 것 같다. 사실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찾은 장소라서 처음엔 일렬로 쭉 늘어선 편백나무들을 세븐스타나무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그 옆에 큰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노을 지는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니 하트모양으로 보여서 '너는 아직 이름이 없는 듯 하니 내가 하트나무라고 명명하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세븐스타나무였다. 이름 없는 쪽은 편백나무 가로수들이었다. 사실 나무야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이름이 무엇이 중요할까. 이름이라는 것에 목을 매는 것은 인간뿐인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홋카이도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동쪽이다. 그래서 해가 빨리 뜨지만 그만큼 또 빨리 진다. 오후 4시를 좀 넘어가는 시점이었는데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보니 욕심이 나서 세 시간을 빌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2시간이 딱 적당했구나 싶었다. 좀 더 일찍 돌아다녔다면 더 넉넉하게 돌아봤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그래도 뚜벅이로 돌아다니면서 알차게 구경한 것 같아 뿌듯했다. 돌아다니면서는 언덕을 오르는 코스가 많았는데 비에이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내리막이 많아 페달 밟을 일도 없이 편안하게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감상했다. 도로에 차도 거의 없어서 위협이 되는 부분도 없었다. 그저 비에이의 경치를 즐기기만 하면 되어서 좋았다.
비에이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밭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볼 수 있었다. 이곳 말고 어딘가에 홀로 우뚝 솟은 '크리스마스 나무'가 있는데 혹시 그것인가 하고 봤지만 그렇게 커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고된 아침 농사를 마친 뒤면 작은 그늘을 파라솔 삼아 새참을 할 수도 있고 잠시 등을 기대어 휴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곳이 비에이였다. (그리고 왠지 시력측정기에서 나올법한 이미지라는 생각도 계속 들었다.)
비에이역에 돌아오니 점심께 출발했을 때 새파랗던 하늘과 산의 모습이 어느새 주황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겨우 2시간 사이에 아예 다른 풍경이 되어버린 도카치다케의 모습에 나는 열차가 도착하기까지 30분 정도를 하염없이 산만 바라보았다. 조금씩 켜지는 가로등도 따스한 주황색 빛을 내어서 약간은 쌀쌀해지는 날씨에 온기를 주고 있었다. 이곳을 꼭 다시 찾아오고 싶다. 다른 어느 때도 아닌 가을에, 내가 보았던 바로 이 풍경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부모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 시기에 이곳을.
자전거를 렌탈샵에 반납하는데 주인장께서 여전히 쿨하셨다. 바깥에 자전거를 세우고 주인분께 키를 반납했는데 자전거의 고장이나 흠집 등을 체크하려는 액션이 없었다. 오히려 '자전거 반납했는데 왜 안 가니?' 하는 표정으로 보시는 기분이었다. 아마 상기된 내 표정에서 '이 녀석 여행이 꽤나 즐거웠나 보군. 자전거 때문에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찾을 수가 없어. 자전거엔 문제가 없나 보군.'이라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때의 나는 몹시 신나 있었다. 홋카이도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비에이. 보통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라고 했는데 이곳은 기대보다 더 큰 감동이 있었다.
원래는 비에이에서 5시 넘어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귀가할 생각이었지만 앞의 일정들이 모두 일사천리로 흘러간 관계로 4시 30분쯤에 출발하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비에이에서 아사히카와로 가는 열차는 지정석이 없었기 때문에 소지한 JR패스를 보여드리기만 하면 되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오히려 좋았다.
아사히카와역에서 곧바로 삿포로로 돌아와 숙소를 향해 걷다가 조금 남은 체력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오사카에는 글리코상(한쪽 다리를 들고 만세를 하는 도톤보리의 유명 간판)이 랜드마크라면 삿포로에는 니카상(아사히계열 위스키회사 니카의 유명 간판)이 있다. 삿포로 최고의 번화가인 스스키노의 사거리에 자리하고 있어 삿포로를 찾은 사람들의 인증을 도맡아 하고 있다. 닛카위스키는 창립자가 스코틀랜드에서 배워온 스카치위스키 제조법을 이용하여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브랜드화 하는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중세 귀족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위스키 한 잔과 위스키의 주원료인 보리를 손에 들린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엔 약간 수줍어하는 듯한 손동작이 킬포인트인 듯하다.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가볍게 마시는 츄하이(소주에 탄산과 과즙을 섞은 것)는 좋아하는데 최근에 하이볼이 워낙 유행인지라 닛카에서 나온 하이볼 두 캔을 사서 한국으로 가져왔다.(하이볼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어느 기분 좋은 날 냉장고에 미리 넣어두고 식사에 반주로 곁들였는데(츄하이처럼 달달할 거라고 생각했다.) 도수도 높았고 뭔가 달달한 맛도 없고 나 무향 같은 것이 나서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남은 한 캔을 어딘가 치워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기분이 꿀꿀하던 날 도수 높은 술 한 잔이 땡겨서 눈 딱 감고 마신 두 번째 캔으로 하이볼의 맛을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 먹어서 눈이 뜨인 것일까, 아니면 기분 꿀꿀할 때 먹어야 맛있는 술인 것일까, 혹은 안주가 오징어라서 맛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술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날도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밤 열 시가 다 되어있었다. 여행일정이 벌써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4일 차는 하코다테로 넘어가는 일정이라 기대가 되었다. 다만 불안한 점이 하나 있었다. 두 개 챙긴 카메라 배터리 중 하나를 벌써 다 써버리고 오후동안 두 번째 배터리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 지금처럼 셔터를 마구 눌러댄다면 5일 차 이전에 배터리가 다 떨어질 상황이었다. 충전기도 없는 상황이라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조금 아껴 쓰면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그것은 5일 차의 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5일차의 일정에서 이야기할 예정이다.) 기대와 불안이 함께하는 3일 차 여행의 밤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