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만자카와 아카렌가 창고군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노면전차를 이용해 주지가이역에서 내렸다. 하코다테 관광의 필수코스인 하치만자카를 구경할 요량이었다. 교차로에 웬 기둥 위 초소가 있어서 가까이 가보니 교통신호 제어 및 전차 노선 변경을 위해 직접 신호를 주던 신호수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1995년까지는 실제로 사용도 되었는데 자동화 시스템의 발달로 결국 사용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일본에 마지막 남은 신호탑이라는 의미 덕분에 철거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적혀있었다. 본래는 교차로 반대쪽에 있었는데 도로확장을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두었다는 내용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근현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에만 의미를 두는 경향이 있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서는 이렇게 근현대의 유물들을 잘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녹이 잔뜩 슬어있는 안내판일지라도 시대를 상상하고 싶은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바탕으로 사극이 찍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하코다테야마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다 보면 점차 이국적인 내음이 난다. 고베의 이진칸에서 느꼈던 서양식 건축물들이 조금씩 보이기 때문이었다. 미일통상조약으로 개항된 두 곳 중 한 곳이 바로 하코다테다. 아무래도 서양의 문물을 조금 더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날씨는 흐렸지만 비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고, 어디를 보아도 불타는 듯한 단풍이 가득했다. 비가 오면서 온도가 조금 떨어져서 그랬는지 낙엽이 떨어지고 있어서 그 부분이 참 아쉬웠다. 한두 주 정도만 일찍 왔어도 더 풍성한 단풍나무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싶었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은 가을의 정취보다는 겨울의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하치만자카로 올라가는 길은 아스팔트가 아니고 비정형의 돌을 깔아 만든 길이었다. 울퉁불퉁한 길은 자동차를 타는 사람의 승차감을 헤치겠지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겐 신선한 볼거리였다. 빗물이 돌 사이사이를 흐르면서 수백 갈래로 갈라지는 모습은 비가 올 때만 볼 수 있는 풍경이리라. 물론 그런 거 안 보고 화창한 하치만자카를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특히나 나같이 비 오는 날이면 따뜻하고 습한 날씨에 노출된 껌처럼 변하는 사람이라면.
비가 와서 그랬을까 컨디션이 상당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보통 비가 오면 두통이 오거나 몸살기운이 있게 마련인데 이 날은 배가 아팠다. 사실 비가 와서라는 것은 핑계고 열심히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주워 먹고 다닌 것이 드디어 사달이 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과 얼마 전에서야 내가 유당불내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우유를 자제하고 있던 차였는데 소프트아이스크림의 원료를 전혀 생각지도 않고 1일 1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챙겨 먹은 것이 누적된 것은 아닐는지. 배가 쌀쌀한 정도가 아니라 급박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중이라 이때부터는 식은땀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치만자카 근처에는 화장실은커녕 커피숍도 쉽게 보이지 않았다. (있는데 정신이 날아가서 안보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급하게 지도를 보니 근처에 모토마치 성당이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랜드마크고 만인에게 열려있는 성당이니 화장실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걸음으로 성당을 향해 달리듯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멋진 풍경을 보면서 사진 한 장을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좋은 풍경이 나올 때마다 괴로움은 커져만 갔다.(나 바쁜데 왜 사진 찍게 하냐고!!) 그렇게 도착한 성당에 화장실은 없었다. 성스러운 곳을 화장실 때문에 찾은 것에 대한 벌이었던 것일까.
더 이상 하치만자카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게 화장실이 있을 법한 곳을 확인해 보니 결국 하코다테 아카렌가 창고군이었다. 이때부터는 내 몸속 어떤 장기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열려는 자와 닫으려는 자의 싸움. 그렇게 힘들게 내달려서 해산물을 판매하는 시장건물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화장실이 비어있었다. 그리고 성당에서 찾지 못한 마음의 평화를 이곳에서 찾았다.
건물을 나왔을 때 세상은 아름다웠다. 비도 약간 더 그쳐있었고, 눈앞에는 그 유명한 카네모리 아카렌가 창고군이 있었다. 보통 눈 덮인 풍경으로 많이 봤는데 하코다테야마의 단풍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붉은 벽돌 건물도 운치가 있었다. 건물에서 산까지 단풍이 이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가을철에만 느낄 수 있는 낭만이 있었다.
아카렌가 창고는 카네모리 양품점이 창고의 필요성을 느끼고 하코다테항의 비어있는 창고를 구입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카네모리 한자를 살펴보면 금(金)이 빽빽(森)하게 있다는 뜻이라서 큰돈을 벌겠다는 창업주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아카렌가 창고군에는 ㄱ자 아래에 빽빽할 삼(森) 자를 넣은 한자가 새겨져 있다. 항구의 붉은 벽돌 건물은 오타루에서도 볼 수 있고 우리나라의 인천 개항장 근처에서도 볼 수 있는데 1900년대 전후의 창고건물의 대표 양식이었던 것 같다. 붉은 벽돌(아카렌가)과 커다란 철문이 특징인데 레트로라고 하기엔 우리 기억에 없는 역사 속 건물이기 때문에 클래식하다는 표현이 맞지 싶다. 내부에는 기념품이나 공예품점, 식당 등이 있는데 내 관심사는 아니라서 외관만 슬쩍 보고 다시 하치만자카를 향해 올라갔다.
홋카이도 대부분이 1900년대에 들어서나 개발이 시작된 계획도시이다 보니 곧게 뻗은 도로가 많다. 하치만자카는 하코다테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이 들러보는 곳으로 바다까지 쭉 뻗은 도로가 속이 다 시원하고 좌우로 예쁜 건물과 나무가 많아서 그림이 된다. 내가 막 도착했을 때에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이겨내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비가 와서 낙엽이 많이 떨어진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알록달록한 가을의 분위기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자카의 도로를 마저 넘으면 하치만궁 신사가 있고 근처에 하코다테 공원이 있는데 이는 여행을 다녀온 뒤에 조사하면서나 알게 된 사실이다. 알았다면 들러보았을 것 같은데 너무나 아쉬운 마음이다. 이렇게 다시 하코다테를 찾아야 할 이유를 하나 남겨놓게 된다.
하치만자카 근처에서는 교회와 성당 건물들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야 흔한 일이지만 일본에 여러 번 다녀온 나로서는 꽤나 진기한 풍경이었다. 일본의 기독교계열 신도는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를 보는 것이 꽤나 어려운 나라다. 가끔 여행을 다니다 만나게 되는 교회를 보면 꽤 놀라게 되는데 하코다테에는 한 장소에 무려 네 곳이나 존재한다. 성 요한 교회는 영국 성공회, 하리스토스 성당은 러시아 동방정교회, 모토마치 성당은 천주교, 그리고 일본 기독교단 하코다테 교회는 개신교 교회다. 미일조약으로 개항이 빨랐던 것이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심지어 홋카이도의 기독교인구는 전체의 3%에 이른다고 하니 다른 지역보다는 확실히 교회가 많을 법도 하다. 교회 건물마다 특색이 있어서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길을 마저 걸어가면 유명한 건물인 구 하코다테 공회당이 있다. 약간 푸른 기운을 내는 회색 벽에 창틀과 난간, 장식 등을 노란색으로 칠해서 대단히 화려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클래식한 서양식 건축물인데 규모도 크고 색채도 화려하다 보니 눈이 절로 간다. 내부에는 거대한 연회장이 있고 황족이 방문할 때는 귀빈실로 쓰이는 곳도 있다고 한다. 내게는 조금 다른 의미였는데, 앞서 언급했던 소년탐정 김전일 이진칸호텔 살인사건의 호텔이 이 건물을 모티프로 했기 때문이다. 호텔의 형태가 매우 중요한 트릭이 되었기 때문에 건물의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만화에서는 3층건물이었고 앞에 넓은 연못이 있는 구조로 그려졌다는 점은 달랐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형태가 같았다. 김전일 덕후가 이렇게 성지순례를 하게 되는구나 싶었다.
이진칸 호텔... 아니 구 하코다테 공회당은 언덕 위쪽의 탁 트인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곳에서 하코다테항이 시원하게 보였다. 공회당 앞에는 모토마치공원이 있을 뿐이라서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날씨가 조금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싶었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적당히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하는가 보다. 그래야 여행이 즐거워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