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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ug 16. 2022

Chapter1 오멍가멍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차귀도와 수월봉








  TV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이 부럽다는 질투가 슬며시 차오르는 순간, 이 순례길의 전체 길이가 800km가 넘는다는 자막이 보인다. 이건 힐링이 아니라 고행에 가깝겠구나 싶었다. 실제로 성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뒤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 이 이베리아 반도의 구석까지 와서 매장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시신을 지니고 이동했던 길이라면 당연히 고행이 뒤따랐을 터, 편안한 산책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의 올레길이 더 고맙고 동네 산책길이 더 친근할 뿐이다. 종교로 빚어진 비극이 가득한 유럽 이상으로 뼈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제주섬이지만, 모두에게 부담없는 힐링의 길을 선사하고 있다. 이 어찌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걷는다. ’힐링‘을 위해서 걷고, ’정화(淨化)‘를 위해서 걷는다. 눈금으로 확인이라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에너지 레벨은 힐링의 산책 후 최고조로 높아졌을 것이고, 순수함의 농도는 정화의 순례 후 불순물 0%의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항상성을 금세 잃는 법. 일상의 스트레스로 기력은 떨어지고, 도처에 가득한 현대생활의 유혹에 굴복해 자석에 철가루가 달라붙듯 속세의 때가 덕지덕지 눌러붙는다. 여기서 걷기의 진정한 목적이 드러난다. 바로 ’다시 더럽혀지고 피곤해지기 위한 일련의 준비 과정‘ 이라는 것. 신성한 걷기를 폄훼하는 문장임을 인정하나 실상이 그렇지 않은가? 마치 술을 마시기 위해 평소 꾸준한 운동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사람 정말 많이 알고 있다. 그나마 운동을 했던 예전의 나를 포함해서.

자구내 포구로 가는 쭉 뻗은 노을해안로

     

  위 사진을 잘 보셨으면 한다. 푸른 하늘에 지평선 위로 굴곡지게 솟아 있는 왼쪽의 오름들이 썩 멋들어진다. 사진 오른쪽의 길을 따라 어서 오름 군(群) 앞으로 달려가고 싶다. 

  차귀도 포구의 다른 이름인 자구내 포구를 처음 찾던 날, 그게 바로 이 지점에 있었던 나의 충동이었다. 속았다. 나는 완벽히 속은 것이었다, 저 오름들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오름의 정체, 차귀도

     

  오름으로 착각했던 것의 정체는 섬이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오름이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틀린 것도 아니려나. 자구내 포구로 향하는 노을해안로의 하이라이트는 그래서, 차귀도가 섬인 것을 확인시켜주는 바로 그 찰나, 바다의 푸른빛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설국>의 첫 문장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사진작가 고속 급변해 버린 백광(白光)의 포인트, 형제해안로에서 오르막을 넘어 산방산을 화들짝 마주하게 되는 변곡점, 그리고 고(故) 김영갑 사진작가의 ’삽시간의 황홀‘과 궤를 같이 하는 반전의 최고봉인 것이다. 음주에 필요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 걷기를 반복했던 힐링과 정화의 공간, 자구내 포구로 다시 향한다.     

준치가 맛있게 말라가고 있는 자구내 포구

      

  자구내 포구의 거의 모든 횟집 사장님들은 곧 관광 낚싯배의 선장님이다. 낚싯배에 탄 손님들이 직접 잡은 물고기를 재료로, 회와 매운탕, 혹은 지리까지 풀코스로 제공한다. 자구내 포구의 앞바다는 수심과 해류의 조건이 맞아 많은 고기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물의 투명도는 단연 최상급. 프로 낚시꾼이 아니어도 제주에서 손쉽게 배낚시를 하고 싶다면 자구내 포구로 올 일이다. 선장님들의 탁월한 능력으로 모두가 풍성한 어획고를 기록할지니.  

  분명히 밟고 서 있는 이곳은 자구내 포구인데, 나중에 어디를 가 봤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차귀도를 다녀왔다고 말한다. 바다 건너 무인도인 저곳에 발을 들여놓은 건 아닌데도 말이다. 그만큼 제주의 서쪽 끝, 이 힐링의 구역에서는 차귀도가 주인공이다. 자구내 포구는 전혀 억울해 하지 않은 채 웅장한 차귀도를 위한 아름다운 조연을 자처하고 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인가. 몇 개의 부속섬들을 합해 부르는 ’차귀도‘란 이름은, 국뽕까지는 아니어도 ’섬‘뽕 정도를 유발하는 작명의 유래가 있었다. 중국 송나라의 호종단이 제주에 와 기운을 살펴보니 훗날 이 섬에서 중국에 대항할 영웅이 나온다는 걸 감지했다나. 덜컥 겁이 난 그들은 제주의 지맥과 수맥을 끊고 서둘러 본국으로 귀환하려 했는데, 한 마리 매로 변한 한라산의 수호신이 호종단이 타고 가는 배의 돛대 위에 앉았고, 순간 돌풍이 일어 배가 가라앉았다는 전설이다. 즉 중국인들이 ’돌아가는(歸) 것을 막았다(遮)‘고 해서 ’차귀도(遮歸島)‘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 실제 차귀도의 모습을 바라보면 한 마리 맹금류가 당당하게 날갯짓을 하기 직전의 순간이 그대로 묘사된 듯하다.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작명 스토리텔링이다. 사진을 보시라, 그렇지 않은가.

섬의 왼쪽부터 매의 부리와 머리, 한껏 치켜올린 날개의 형상이 이어진다

     

  관광객들은 제주의 서쪽 끝 이곳에서 차귀도를 조망하는 눈의 호강 외에 학술적 현장까지 답사할 수 있다. 특히 자구내 포구에서 수월봉 구간의 지질 트레일 코스를 걷다 보면 화산암의 퇴적층이 적나라하게 구분돼 쌓여있는 절벽을 볼 수 있는데, 마치 티라미수의 절단면을 확대한 느낌이다. 지금 살짝 허기가 져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무튼 그렇다. 무려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지질공원답게, 이전엔 보기 힘들었던 지질 탐방객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트레일의 한쪽을 따라 이어진 절벽을 유심히 살피며 걷는 그들의 모습에서 제주 관광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보게 된다.     

자구내 포구에서 수월봉 하단으로 이어지는 지질 트레일 코스

     

  마그마는 여러 유형의 물(지하수,바닷물,호수,빙하)과 반응해 수성화산체를 만들게 되는데 수월봉은 그 중 대표적인 응회환(tuff ring)이라고 한다. 어렵지만 성산일출봉과 비교를 통해 한 겹만 들어가 보자. 먼저 응회구(tuff cone)와 응회환의 차이다. 응회구는 비교적 수면 가까이에서 일어난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지형으로 50m 이상의 높이에 경사가 급한 화산체를 말한다. 분화구도 좁고 얕다. 반면 응회환은 깊은 지하에서의 폭발로 형성돼, 고리 모양의 분화구가 크고 깊으며, 경사가 완만한 낮은 화산체이다. 5,000년 전 얕은 해안에서 분출한 마그마가 바닷물과 반응해 만들어진 성산일출봉은 지표 부근 핀포인트 폭발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해당 지점에서만 화산재층이 높게 쌓인다. 이와 달리 수월봉은 약 17,000년 전에 분출한 화산폭발의 결과물이다. 당시 제주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의 화산이었던 까닭에, 자연히 마그마가 바닷물이 아닌 지하수와 반응해 만들어진 수성화산체가 수월봉인 것이다. 뾰족하게 솟아있는 응회구인 성산일출봉과 달리, 깊은 지하로부터의 강력한 폭발로 화산재층이 넓게 퍼져나간 응회환의 특성을 가진 수월봉은 야트막한 언덕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깊은 땅 속에서의 폭발이었으니, 화산재층은 물론이고 여러 기반암 물질을 함유하고 있음이 당연하다. 

대표적 응회구 화산체인 성산일출봉    

대표적 응회환 화산체인 수월봉과 그 자락

     

  자구내 포구에서 이어진 길이 수월봉의 오르막과 겹치는 부분에 우뚝 솟아 있는 암석이 재미있다. 궁궐이나 사찰을 지키는 사자, 혹은 해태의 형상이 아닌가. 바로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겁을 주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전설 속 맹수의 모습 그대로다. 자연이 빚어낸 스타카토 같은 작품이 아닐까. 아래에서 맹수와 똑같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제법 있을 성싶다.     

수월봉 아래의 기이한 암석

     

  오늘은 제주섬의 서쪽 끝을 탐미하고 있는 중이지만, 어느 때보다 제주의 동서를 넘나들 계획이다. 멀미약은 준비되셨는지. 거문오름을 위시한 제주의 동부와, 산방산, 용머리해안을 아우르는 남서부, 하논분화구의 독특한 지형을 안고 있는 남부를 비롯해 제주의 허파인 곶자왈 구석구석을 모두 둘러봐야 제주 지질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어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가. 이 신비한 화산섬에 대해 효율적으로 알아보고 싶다면 첫 방문지는 예습이 가능한 곳이 되어야 하겠다. 제주 지질의 특징이 정리되어 있는 곳, 그러나 제주의 삼다 중 하나인 ’돌‘이 환상적으로 줄지어 있는 광활한 무대, 제주돌문화공원이다. 자칫 지질 공부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공원 자체의 이국적 분위기에 압도당할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하자.

제주돌문화공원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제주돌문화공원은 압도적이다. 가슴이 뻥 뚫리는 야외공간은 기본이고, 설문대할망의 형상을 한 돌 박물관에서는 제주섬의 탄생부터 각 지역 지질의 특성을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으로 한 수 배울 수 있다. 어찌 환상적인 예습 장소가 아닐는지. 돌문화공원을 거친 후 수월봉 지질공원을 찾게 되면 은근한 여유와 함께 미소가 지어질 법하다. 이게 바로 테마관광의 모범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제 제주 낙조의 성지 혹은 노을 맛집, 수월봉으로 올라갈 차례다. 약간은 골치 아팠던 지질 이야기는 잊자. 한여름의 무더위가 두렵다면 차를 타고 가도 좋을 일이다. 거의 정상 부분에 주차도 가능하니까. 그 외의 계절엔 걸어 올라가자. 그래봤자 낮은 응회환 아닌가.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봉우리 절벽의 약초를 따려다 그만 실족해 숨졌다는 수월이의 전설이 그대로 봉우리의 이름이 되었다. 위용 가득히 시야를 채웠던 차귀도는 이곳 수월봉 꼭대기에서는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변해 버린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언젠가 이 자리에서 바라봤던 해넘이가 눈에 선하다. 제주의 클래식, 영주십경에서는 ’사봉낙조(紗峯落照)‘라 해서 해넘이 명소를 제주시 사라봉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나는 ’수봉낙조(水峯落照)‘라 하겠다. 개인의 취향은 제주의 선조들이라도 막지 못하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성산일출봉 vs 수월봉의 구도가 재미있다. 응회구 대 응회환, 일출의 명소 대 일몰의 맛집. 무엇이든 라이벌이 있어야 한층 성장하는 법이다.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차귀도

수월봉 정상

     

  하루 종일 야외촬영을 해도 힘이 남아돌던 시절(술 마시기 위해 운동을 할 필요도 없었던), 하루는 제주의 전통주, 고소리술 명인을 만나 제조과정을 배워보는 촬영을 했었다. <6시 내고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경면에서 고소리술을 만들고 계신다 하니, 마지막 장면은 무조건 수월봉이라는 담당 PD의 말. 소중히 내린 방울방울을 모아 한 병의 고소리술이 채워졌고, 명인과 나는 수월봉에 올라 잔디에 앉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한 방향의 시선, 순백의 잔에 또르르... 투명하기 그지없는 고소리술의 낙하.

  아까 말씀드렸다. 이번 글에선 동서를 정신없이 넘나들 거라고. 성산일출봉과 돌문화공원에 이은 세 번째 순간 이동이다. 김희숙 명인과 함께 술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는 ’술익는 집‘이다. 표선면에 있으니 정확하게는 제주의 동남쪽이라고 해야겠다. 서쪽 한경면의 명인에게 제조법을 배운 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당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제주의 반대편인 이곳에서 다시 한번 고소리술의 복습에 들어간다.

표선에 있는 ’제주 술 익는 집‘

       

고소리

          

  증류주를 만들 때 쓰이는 그릇으로, 위 아래 겹쳐서 사용하는 소줏고리의 제주말이 바로 ’고소리‘다. 벽에 걸린 제조법 안내문을 보니

① 재료 씻기

② 누룩 만들기

③ 고두밥 만들기

④ 발효

⑤ 증류

⑥ 저온 숙성

  모두 6단계다. 고소리가 필요한 것은 다섯 번째 단계, 발효가 끝난 술을 넣고 증류를 하는 과정이다. 숙성하는 과정이 남아 있지만, 방울져 떨어지는 고소리술의 원초적인 풍미를 그대로 식도로 넘겨도 좋을 일이다. 이름처럼 고소하지는 않겠지만. 

  다시 수월봉. 마지막 이동이다. 더 이상의 멀미는 없다. 제주의 전통 갈옷을 입은 고소리술의 명인은 나를 바라보고 지긋이 미소를 짓는다. 선수들만 아는 신호, 건배의 시간이다. 절경을 자랑하는 수월봉의 꼭대기에서 산들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명인이 만든 술이라니... 출연료는 퉁 쳐도 그만이다. 일의 보람이란 건 진정 이런 것인가. 차귀도가 떠 있는 망망대해를 잠시 바라본 뒤 잔을 입속에 털어 넣는다. 잔이 작을수록 원샷은 필수니까.

  아! 0.5초 뒤 찾아오는 식도의 고통. 40도의 독한 증류주가 그 위력을 드러낸다. 분위기에 취해 빈속을 독주로 적셔 버렸다. 아무리 정신없었어도 준치 다리 하나쯤은 들고 왔어야 했다. 안주 없냐는 강렬한 눈빛을 보냈지만, 멀찍이 서 있던 PD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경험이 더 쌓여야 한다. 야외 촬영 때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그래도

  엔딩 장면을 고소리술과 함께라니. 이만하면 수봉낙조의 화룡점정이다. 

  붉은 노을이 더 붉어진다. 잊지 못할 호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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