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민속오일시장
오랜만에 오일시장을 찾았다. 시골에 집을 짓고 살아보자니 농기구와 채소 모종, 강아지 목줄에 이르기까지 마련할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오일장을 동네 편의점처럼 들락거릴 때가 있었다. 사실은 무얼 구입하려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막걸리를 한 잔 걸치러 일부러 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게으름을 피우느라 한동안 애인과의 데이트에 소홀했던 것 같은 죄책감이 슬며시 피어오른다. 그래도 오일장 경험만 몇 년인가, 제주시 민속오일장의 섹션별 가이드 정도는 지금도 가능하다는 허세를 부려본다.
많은 제주의 장터 중 대표 격인 제주시 오일장인지라 관광객들이 태반이다. 요즘은 오일장이나 야시장 등이 국내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라고 하지 않는가. 다른 지방의 시장에서는 보기 힘든 제주의 특산물이 시장 내에 널려 있으니, 외지인들은 한 번 들어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둘러보기 마련이다.
제주 오일시장
장날을 기다리는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주차 공간 찾기가 여간 수고스럽지 않다. 물론 큰 덩치의 공영주차장 건물이 새로 들어선 후로 악명 높은 주차난이 어느 정도는 해소된 듯 보인다. 그렇다 해도 2와 7로 끝나는 날에 오일시장 입구 부근 일주 도로는 그야말로 퇴근 시간의 서울 한복판과 마찬가지다. 장날이니 막히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과거 십 수년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차량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한다. 양손 가득히 들고 올 짐을 생각하니 버스를 타기엔 정류장까지의 걸음이 부담스럽고, 차를 가지고 가자니 꽉 막힐 도로도 걱정인데다 주차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총성 없는 경쟁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제주시 오일장을 갈 계획이라면 아예 맘먹고 아침 일찍 서두르는 편이 낫겠다.
하긴 장날에 원래부터 붐볐던 오일장 부근 도로는 이해라도 된다. 한때 러시아워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제주도의 교통 상황은 제주 이주의 붐, 그리고 부동산 열풍 이후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전국적인 추이와 맞물려 2021년 첫 인구 자연 감소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67만의 인구에 60만 대가 넘는 차량이 등록돼 있으니 1인당 차량 보유 대수가 0.9대에 육박하는 것이다. 전국 평균이 0.4대 정도에 그친다는 통계를 보면, 상대적으로 얼마나 많은 차들이 제주의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건지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민의 살림살이가 넉넉해 차가 많아진 것 같지는 않다. 유일한 대중교통이 버스밖에 없는 환경에서, 차 한 대 갖고 있지 않으면 이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버리는 바람에 승용차를 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제주로 이주한 뒤 처음 접한 2002년 통계가 차량 20만 대 미만이었으니 인구의 증가 폭보다 월등한, 그야말로 미친 차량 증가 추세였다. 머지않아 삼다도의 요소인 돌, 바람, 여자 중 ‘여자’를 ‘자동차’로 대체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 최근의 인구조사에서 남자의 인구가 여자보다 1퍼센트 많은 것으로 나왔으니 당위성도 있다. 돌과 바람은 그대로인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것인지.
전국의 오일장이 서민들의 쇼핑몰로 자리 잡은 건 17세기 말이었다. 그전에도 장은 열렸으나 간격이 더 멀었다고 하고, 보부상들의 증가와 물물교환 필요성의 증가로 점차 닷새 간격의 장이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거래되는 품목들이 주로 농작물이다 보니 기상(氣象)과 관련된 이유도 있었다. 일 년을 24절기로 구분한 것도 농업의 편의를 위해서일 텐데, 절기를 보름씩으로 나누어진 기(氣)로 재배치하고, 기를 다시 삼등분한 닷새를 ‘1후(候)’로 하는 세분화된 시간의 길이가 만들어진다. 조상들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날씨가 평균 1후 동안 비슷한 기후를 보이고, 하나의 후가 끝나고 다음 후로 넘어가면 다른 패턴의 날씨로 바뀐다고 한다. 그에 따라 농작물의 재배와 추수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닷새 리듬에 맞춰 장이 서게 됐다는 것이다. 한편 나흘 일하고 닷새째 쉬는 우리 농민들의 평소 생활패턴에 맞춰 오일장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과거 제주인들의 생활양식이 육지부 전통 농경사회의 그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겠지만, 열심히 일해 수확한 것들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 아닌가. 제주의 장터 운영도 나라 표준인 닷새 간격으로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은 퍽이나 자연스러울 뿐이다.
제주시 오일시장 내 할망장터
입구를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제주의 할망들이 우영팟(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들을 직접 판매하는 ‘할망장터’가 나온다. 짙은 초록색의 싱싱한 채소를 사며 할망들 연세를 여쭤보시라. 어느 분에게 물어보아도 짐작보다 고령인 것에 깜짝 놀랄 것이다. 파전이나 부쳐 먹을 요량으로 사진 속 할머니께 쪽파를 샀다. 상추와 깻잎, 부추는 매년 모종을 사서 심어놓고 실컷 따서 먹는데, 쪽파를 빠뜨렸기 떄문이다. 다시 올 때는 모종 파는 곳을 집중적으로 돌아봐야 할 듯하다.
오일장이 매력을 최고로 뽐낼 때는 역시 봄이 아닐까. 심자마자 자라는 놀라운 생명력의 채소 모종과, 긴 겨울—제주의 겨울은 기온에 비해 너무도 스산하고 춥다—을 뚫고 자란 형형색색의 꽃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봄 오일장 덕후들을 꿀벌에게 그러하듯 유혹한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순간은 어찌 보면 온도의 변화보다 하늘색의 변신인 듯. 암울한 회색은 사라지고 티 없이 푸른 하늘에서 투명한 햇살이 내리쬐면 그때부터가 봄인 것이다. 오일장에서 마주치는 봄꽃은 아무리 무질서하게 모여 있어도 새로운 빛을 받아 조화롭게 아름다울 뿐이다.
봄이면 오일장은 곧 화려한 꽃밭으로 변신한다
총천연색으로 장터를 수놓는 꽃들은 왜 이리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황홀하게도 아니며 슬프게도 아닌 ‘싱숭생숭’해서 오묘한 것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갈팡질팡한 상태라는 것.
사람이 볼 수 있는 빨주노초파남보의 가시광선 스펙트럼 중 파장이 가장 긴 빨강부터 주황과 노랑까지는 교감신경을 자극해 사람을 흥분시킨다고 한다. 긴 파장이 심장과 신경계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굳이 원리를 파고들지 않아도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하다. 반대로 파랑, 남색, 보라로 점점 짧아지는 파장의 색들은 심장박동 수와 맥박을 낮추는 효과가 있어, 가라앉고 안정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색 마케팅의 원리 중 하나지만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효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저 진하고 강렬한 아름다움만 느껴지는 것도 아니며 우아하고 고상한 매력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복합적이고 싱숭생숭한 봄의 마력이 오일장 꽃들의 마구잡이 컬래버레이션으로부터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봄이 되면 더욱 바빠지는 농기구점 안의 대장간
갈치는 역시 제주 오일장에서
오일장의 생동감은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대량으로 생산한 공산품과 함께 가내수공업으로 직접 만든 것들, 손수 키우거나 재배한 것들이 당당하게 각각의 코너를 채우는 동시에, 대형 마트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상인들의 자부심 섞인 호객이 더해진다. 과일이나 묘목, 심지어 호떡 하나라도 오일장의 베테랑 상인들은 자신이 팔고 있는 것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껍질 까기 수월한 한라봉이 어떤 놈인지, 꽃은 언제쯤 피고 열매는 언제 처음 달릴 나무인지, 이 호떡이 다른 곳에서 파는 호떡과 뭐가 다른지, 답하지 못할 질문이란 없는 것이다. 자신이 만들고 가꿔온 자부심으로 떵떵거리며 호객할 수 있는 건강함이 모여 오일장 전체의 활력을 만들어낸다.
사람과 사람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에 애착이 더해가는 요즘이다. 스마트폰 화면 위의 능숙한 터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 당연해질수록, 마음은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곤 한다. 잔뜩 구부러진 몸으로 하나하나 키워내 세월의 맛이 더해진 제주 할망들의 푸성귀가 있는 곳, 오일장이 바로 그런 곳 아니겠는가.
“뻥이요!” 소리는 제주 오일장에서도 들을 수 있다
빙떡 등 먹을거리로 가득한 오일장
당연하기에 깨닫지 못했던 고마움을 느낀다. 오일장의 상인들뿐 아니라 어깨를 부딪치며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삶의 진한 냄새가 배어 나온다. “뻥이요~~!” 소리에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는데 입은 웃고 있다. 오랜만에 빙떡 한 봉지를 사고 나서, 마당의 빈 공간을 책임질 자그마한 묘목을 골라본다. 너무 커버린 나무는 내 자식이 아닌 듯 보여 키 작은 꽃복숭아나무 한 그루를 입양한다. 봄에 피는 진분홍빛의 꽃이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빠뜨린 총각무가 떠올라 다시 할망장터로 걸음을 재촉한다. 다른 장터와 비교해 호객의 유혹이 거의 없는 구역이라 맘이 편하다. 어서 오시라는 손짓과 외침은 없어도 손님을 끄는 기운만큼은 당당하다. 거친 세상 살아가는 데 도가 트신 달인이자 장인의 공간인 것이다. 할망들이 그 자리에 앉아 계시기만 한다면 언제나 감사하게 달려갈 따름이다.
세상의 변화는 달리는 차에서 얼굴을 내밀며 맞는 맞바람처럼 버겁기만 하다. 바람에 맞서 달리는 일상이 한없이 지치고 가슴을 내리누를 때, 제주라는 섬은 그저 가만히 보듬을 뿐이다. 제주를 닮은 할망장터의 할망들은 결국 아무것도 버거운 것은 없다고, 이마에 새겨진 주름을 통해 말씀해주신다.
부디 오래오래 그 자리 지켜주시길.
섬이 그 자리에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