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회고형 기록)와 플래너(계획형 기록)
일기
오늘을 회고함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한 행위가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단연 '일기(日記)'입니다. 책상에 앉아 손만 뻗으면 닿는 두꺼운 네이비 컬러 일기장이 있어요. 피곤하면 피곤한 대로, 와인을 마셔 약간의 취기가 올라올 때면 또 그러한 대로, 밤이면 밤마다 그 날을 회고하며 느릿 느릿 쓰는 일일 회고록 되시겠습니다.
얼마 전 경주여행 첫째날 저녁 펜션의 테라스에서 회 한 접시를 앞에 두고 남편이 그러더군요. 언젠가 출근하기 전에 어쩌다 그 일기를 보게 되었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왜. 남의 일기 훔쳐보고 울고 난리인가.
일기는 왜 쓰는 겁니까.
끄적거리는 '쪽지'나 멋들린 '에세이'와 '일기'는 참 다릅니다. 곧 학교에 입학할 딸 아이가 일기가 무어냐 묻는다면 나는 '일기는 미래의 나에게 쓰는 편지'라고 할 겁니다. 편지의 내용은 그 날을 육하원칙에 의해 세세하게 회고하고 기록 당시의 감정과 생각을 곁들이는 겁니다. 인사이트나 메시지가 없어도 되지요. 하지만 놀라운 건 그 기록 자체가 몇 달 뒤, 몇 년 뒤의 내게 놀라운 영감을 던져준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어린 '나', 의외로 어른스러운 '나', 기쁨이나 슬픔에 잠겨있는 '나', 고통을 통과하는 '나', 사람들과 교류하는 '나', 무언가를 배우며 몰입해 있는 '나', 과거의 '온갖 나'가 부지런히 적어 내려간 문장들이 미래의 나에게 속삭이는 이야기. 일기를 쓰는 기록자이며 동시에 과거 내가 쓴 수많은 일기의 성실한 독자로서 이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 1년 나의 일기에는,
'글 쓰는 오늘' 커뮤니티의 여정, 자기계발서 읽기 대신 만나는 좋은 사람들 이야기, 사람들을 만나 내가 선언한 나의 꿈 이야기, 냉각된 부동산 시장과 금리인상으로 얼어붙은 나의 경제심리 등에 관한 내용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삶에서 거저 얻은 행복과 쓸데없이 느끼는 슬픔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아무튼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내 인생, 이라는 걸. 일기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내게 일러줍니다.
이것이 스무 해 넘는 동안 내가 경험한 일, 기, 입니다. 무척이나 사적이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읽는다면 불편해서 참을 수 없을, 기록인 것이죠.
플래너
내일을 계획함
일기쓰기만큼 기쁘게 몰입하지 못하지만 매일 붙잡는 또 다른 기록은 나의 일과 계획을 적는 플래너입니다. 꼭 해야 하는 일들을 적기는 하지만 결국 내 구미가 당기는 일만 처리한다는 점에서. 결국 내가 흥미를 갖고 좋아하는 일들에만 'done'으로 표시되는 결말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일조차도 감정적으로 취급하고 처리하는 나의 유아스러운 모습에 혀를 내두릅니다.
수행해야 할 많은 하루 업무들 중에 내가 좋아하는 단지 몇 가지 일들만 체크 표시(done)를 하게 되는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반기마다, 해마다 부지런히 플래너를 구비해 두고 계속 쓰는 이유. 외출할 때도 가방에 꼭 한 번은 슥- 넣어두는 이유.
플래너를 쓰면서 긍정적 자아를 갖기 때문이에요.
자기확신 속에서 긍정 정서를 품으며 플랜을 적는 내 모습. 나는 그 모습을 몹시도 애틋하게 여깁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불안과 공상, 추억 속에 있기에. 잠시 플랜을 손으로 적어보고 어렵사리 한두 가지 투두리스트를 해치우는 나를 칭찬합니다. 체크박스에 체크를 표시할 때 그 누구도 칭찬해 주지 않길래, 내가 스스로 칭찬하는 겁니다.
기록을 합니까.
무엇을 얼마나 성실하게 기록했습니까.
오늘 글을 쓰면서 초등학교 3학년 처음 갖게 되던 남색의 세로형 다이어리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깨어져 버린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을 먼쓸리에 적어두고 내 생일보다 더 기다렸던 나를 기억했고요. 6학년 때 쓴 감사 목록 일기와 대학교 때 나의 성적에 관해 회고한 노트도 떠올렸습니다. 인생에 회고할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요.
밀도 높았던 나의 회고.
나는 회고할 때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앞으로는 회고형 기록의 비중을 조금 줄이고 계획형 기록을 좀더 하고 싶다 소망해 봅니다. 마흔을 앞둔 내 인생. 촘촘히 회고했던 것처럼 이제 촘촘히 계획도 가져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