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는 좀더 깊어질 수 있으려나
마흔 이후의 설렘이 20대의 설렘과 다른 것은 '행복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것'에서 설렘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순간의 기쁨이다. 게다가 설렘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있게 해석할 줄 알게 되면, 전혀 설레지 않는 권태로운 순간에조차 '설렘의 향기'를 마치 보물창고에서 꺼내듯 쓸 줄 알게 된다.
정여울 『마흔에 관하여』
안녕, 기미
안녕, 마흔
나름 쉬면서 일한다고, 느릿 느릿하지만 나로서는 굉장히 주도적으로 공부와 일을 벌려가며 상반기를 보내다 여름을 마치며 번아웃 증상을 만났다. 몰입 후에 오는 이 정지 현상에 어쩔 줄 몰라하며 힘들어 한건 회사를 다녔던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렇지만. 번아웃 기간에 몰아치는 이 부정적이고 침체된 감정과 생각들에 마냥 잠겨있지 않고, 곧 흘러갈 거라 신뢰하며 평정을 되찾는 가을을 보내고 있음에 감사하며.
지금 난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잠시 물러서 저 멀리를 바라보며 와인도 마시고, 책도 읽고,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고 있을 뿐이다.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고, 관계도 망치고, 경력도 흘려보낸 '젊고 어린 청하'는 굿바이다.
번아웃과 무기력으로 9월을 보내온 시간을 삽시간에 집어 삼켜준 일이 있었다. 곧 마흔, 곧 마흔, 이러면서 최근 3~4년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쩌면 내게 '너 이제 진짜 곧 마흔이야.'라고 일러주는 이야기.
이 가을에 만난 그 이야기. 둘째가 생기려나, 하고 자가 임신테스트를 마치고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검진을 받았는데 2.5cm의 자궁근종과 물혹이 보인다는 것이다. 근종은 감기처럼 흔하지만 6개월에 한 번씩 자궁근종 크기 확인을 위한 추적 검사를 해야 하고, 물혹은 이번에 임신이 아닐 경우 생리하며 터질 거니 염려 말라는 의사의 말은 참 따뜻했다. 병원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며 얼마나 많은 삶의 위태를 봐온 사람이겠는가. 2.5cm의 자궁근종과 물혹, 생리불순은 진실, 큰일이 아닌 것이다.
올봄 화장을 하다, 없던 기미가 옅게 거울에 비치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냅다 피부과로 달려간 일이 있었다. 내 인생 피부관리는 기미 방어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터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피부과 의사는 나이에 비해 기미가 많지 않으니 2~3년 후 즈음 기미가 더 퍼졌을 때 기미 케어를 받으시는 게 비용이나 효과 면에서 좋다 했다. 이 옅은 기미도 못 참겠으니 어서 지워 주시라 하고 찾아간 거였는데. 기미 하나 없이, 감정 하나 없이 시술 솔루션을 제안하는 의사의 얼굴을 몇 초간 쳐다보다 나왔던 날.
자궁근종의 증상 중 하나로 '기미'가 있다고 했다.
그렇구나. 하루 아침에 눈에 띄게 보였던 그 기미는 자궁에서 근종이 자라남과 함께 피부 깊숙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을 테다. 외부에서 자외선을 철벽 방어하고, 좋은 화장품을 발라대도, 거침 없이 피부 바깥으로 돌진했을 것이다. 이제 파운데이션만으로는 안되겠고 컨실러가 필요한 단계가 된 것. 피부 표면 아래에서 일어나는 상황도 관리에 들어가야겠다. (-_-)
하긴, 피부뿐이겠는가.
최근 일교차가 벌어지며 실내 공기도 차게 느껴지자 제일 먼저 준비한 게 고가의 기능성 속옷이었다. 방한계획이나 월동준비니 하는 머릿속 계산 없이 반사적이고 본능적으로 내 몸을 보호한 것이다. 작년 이사온 집에서 한 겨울을 보내며 이 집이 예사롭지 않게 추운 집인 것을 알았으니 이번엔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생각해 난방용품과 기모 레깅스, 기모 요가복도 집중적으로 장바구니에 넣어 놓았다.
가을, 겨울 패션 검색해 보며 외출복을 장바구니에 넣어놓는, 그런 트렌디하고 감각적인 일은 없었다. 지금은 멋보다 내 몸이 우선이다. 날이 추워지면 만나서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고 싶었던 사람들은 기억나지도 않고, 지금 내 몸, 이 몸뚱아리를 지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내 모습이 조금, 아주 조금 싫다.
얼마 전에는 아이가 나와 가까운 거리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고막이 터질 것 같이 귀가 예민해져 인상을 찌푸린 일도 있었다. 내 앞에서 노래 부르는 아이에게 오만상을 찌푸린 것이다. 3년 전에 미라클모닝을 빡세게 하다 이석 증상이 오고 그만둔 일도 기억나 이비인후과에 가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이렇게 예민해질 때마다 온갖 병원에 다 들르면 마흔 너머 매일 병원에 다니는 중년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내 생각은 늘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으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일을 피하려면 이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고 좋았다. no인지 yes인지 내 생각 제대로 말해야 했다) 내 감정이 받아들여진 적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내가 기쁠 때나 화날 때, 슬플 때, 공감을 얻어본 일이 손에 꼽는다. 누구 앞에서 내 감정을 말하는 일은 나의 미숙한 영역이 되었고, 점점 감정을 혼자 처리하고 해결하는 일에 능숙해진다.
사람을 통해 위로 받는 방식은 어쩐지 얄팍하게 느껴진다. 내가 연약함을 드러낼 때는 인간적이라 좋다 하면서, 점점 나의 연약함이 얼마나 깊고 험한 것인지 알게 되면 떠날 사람들이 대부분일테고. 나의 연약함과 위기, 힘든 상황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두고 내가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보통 그 상황이 깔끔하게 지나가고 나서야 말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나의 이 모습이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움으로 비추어져, 나에게 수없이 많은 생각과 감정을 나누어 주곤 한다. 나한테 이런 걸 이야기한다고? 내게 이렇게까지 진솔하게 많은 카드를 보여줘 버리는 친구들이 어리숙해 보였지만. '진솔한 사람들을 얻는 일'이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진리를 알게 된 어른이 되어서는 이 친구들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코치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다음주 월요일에 최종합격 발표가 난다) 몰랐던 나의 강점을 알게 되었다. 난 공감력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몰입된 경청을 통해, 나다운 모습으로 아주 깊은 공감을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걸.
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어려웠을 뿐, 내 감정을 스스로 공감해 주지 못했을 뿐,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을 편견 없이 듣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를 응원하는, 강력한 마음 자원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래, 몸은 약화되고 마음이 강화되는 나이.
그게 마흔이겠구나.
몸을 좀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마음을 위해 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몸과 마음을 제때,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쓸 수 있도록 애써야지. 동의보감과 영양제를 공부하는 한편, 이제 취미운동이 아닌 생애운동을, 맛내는 요리 아닌 원기를 위한 요리를 탐구해야겠다.
자궁근종과 물혹, 둘째 임신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지금의 내 몸.
몸은 늘 내게 삶의 메시지를 주었다. 분노를 잠재우는 훈련으로 육상을 시작했고, 불면이라는 신호로 요가를 만나게 했고, 우울증을 계기로 관절과 골밀도를 체크했고, 거식으로 응급실에 누운 날 내면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난 이번 가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마흔을 기대하고 희망하기로 한다.
2023.10.12
10월의 생리를 간절히 기다리며
아인슈페너와 함께 마흔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