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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liy Apr 02. 2023

파벨만스

예술과 가족과 고통과 아름다움의 러브레터


파벨만스

연출: 스티븐 스필버그

각본: 스티븐 스필버그, 토니 쿠슈너

출연진: 미셸 윌리엄스, 폴 다노, 가브리엘 라벨

상영 일정: 2023년 3월 22일 개봉

상영 시간: 151분

번역: 황석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이야기가 담긴 자전적 영화인데, 사실 영화를 위한 영화라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해 얘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500억짜리 심리 치료에 가까웠다. 그러나 스필버그의 인생은 오직 영화였고, 오직 영화를 통해서만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파벨만스라는 영화가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스필버그는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에서 <지상 최대의 쇼>를 본 이후 영화에 매료된다. 충돌하는 기차의 생경한 감각에 충격을 받은 스필버그는 그 이후로 기차 장난감과 8mm 카메라로 자신의 영화를 연출한다. 스필버그의 영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자신이 자라온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영화에 대한 애증의 일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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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기복 없이 담담하게 이어지는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웃음 포인트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2시간 반동안 은은하게 찔찔 울면서 봤다. 웃으라고 넣은 장면에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내가 도대체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특히 울컥했던 장면을 떠올려보니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새미가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충격받아 세상을 온통 영화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피아노를 사랑해 아끼던 손톱을 자르고 쇠붙이 대신 플라스틱만을 사용하는 새미의 엄마, 그리고 컴퓨터에 매료되어 하루종일 컴퓨터 얘기에 혈안인 새미의 아빠, 그리고 새미



위의 두 장면때문에 영화 초반부터 눈물이 났다.


미술 말고는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 없지만, 완전히 매료 되었던 순간이 있었는지, 무엇때문에 예술을 사랑하게 됐고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충격을 동반한 울림과 감동을 경험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에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운과 용기와 열정이 부럽고 질투났다. 기쁠 때 혹은 슬플 때에도 나는 예술을 열망하고 그에 의지할 수 있을까? 온통 예술 뿐인 삶을 감내할 자신이 있는가? 계속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가? 내가 믿는 예술의 가치를 나중에도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로 만든 스필버그의 인생을 갖고싶었고, 자격지심에 떨었고, 불안했기 때문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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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미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의 오빠인 보리스가 찾아온다. 보리스는 서커스에서 일하고, 무성영화에 출연했기에 새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예술은 당신의 가슴을 찢어놓고, 중독시키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소중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동시에 당신에겐 그토록 예술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준 어머니 또는 아버지, 어느 어른이 있다’



예술은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고, 날게 한다. 예술없는 삶은 없고, 예술은 우리의 삶과 늘 공존해야 한다. 하지만 예술은 나를 외롭게 하고, 고립되게 하고, 가족과 떼어 놓는다. 예술과 가족은 인간을 반으로 갈라놓는다. 예술은 이렇게나 파괴적이다.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잘하는 것을 업으로 하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보리스가 샘에게 해준 말들은 내가 미술을 단지 취미로 남겨두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해 주었고, 그간의 혼란과 불안감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단번에 인정해준 것 같았다. 효율만을 최고로 여기는 사회에서 예술은 쓸데없는 것, 속편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의 것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예술은, 또 언젠가는 예술의 힘을 인정받을 순간이 오리라는 믿음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를 지치지 않고 추구하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내가 품은 가치와 고민은 오직 예술로 보상받고 분출되고 강화되고 해소되는 것이었다. 괴롭고 가슴떨렸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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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촬영한 해변 영화를 학생들 앞에서 상영하고, 그에 울고 웃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새미.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새미를 괴롭혔던 로건을 영웅처럼 묘사한 새미와, 새미에게 왜 자신을 그렇게 영웅처럼 찍어놓았는지 따지며  영화속  자신의 모습처럼 될 수 없음에 괴로워하는 로건.



위의 두 장면에서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잘 모르겠다. 예술로 사람들을 웃게하고 또는 울릴 수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던건지… 열망과 욕심에 비해 부족하고 초라한 내 모습에 실망하고 힘들어하던 것을 로건에게 투영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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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삶의 비극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영화(예술)은 감독에 의해 통제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비극을 통제함으로써 비극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삶을 예술로써 통제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스필버그가 평생 영화에 자신을 내던지고 그에 수반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늘 자신을 따라다니던 어린 날의 상처와 짐을 통제할 수 있는 건 감독으로서 자신의 시선 뿐이다. 상처가 아물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도 결국 나뿐이다. 예술은 가짜이지만 인생은 진짜이며 통제할 수 없음에서 오는 절망을 나의 일부로 끌어들여 ‘나’ 자체로 완성하는 것은 결국 예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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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예술 없는 나의 삶은 상상할 수 없지만 


취미를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자 불행인지, 


나의 열등감이자 원동력이 예술임을 진작에 알아차린 게 나를 얼마나 안심시키고 때로는 갉아먹는지,


훗날 내가 더이상 예술을 의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버틸 수 없을 때의 상실감을 감내할 수 있는지.



나는 올지 안올지 모르는 순간을 애써 상상해보고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영화, 즉 예술은 엄마 미치의 말처럼


잊히지 않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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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매순간 아름답고 괴로웠다. 


예술에 대한 나의 믿음을 의심하게 될 때, 이 영화를 곱씹게 될 것 같다.



내가 독일에 가려는 결심을 한 것도 예술과 가족 때문이니까..예술과 가족은 나를 반으로 갈라 반은 한국에 반은 독일에 가져다 두었다.


내 도전은 예술과 가족때문에 기꺼이 스스로를 갈라놓으려는 큰 결심과 같으니까..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했지만 도전이 헛된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영화다. 안심이 되어 울었다. 내 사랑은 쓸데없고 부질없는 일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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