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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 Jan 18. 2023

대단함을 마주하면 나도 대단해지는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 오르테세이 여행

시작은 어느 온천가게의 홍보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뜨거운 물에 담긴 수영복 차림의 한 여자는 카메라를 뒤로한 채 산 꼭대기가 살짝 눈으로 덮인 커다란 산을 앞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다! The Alps, 알프스.


사진 속 산은 다름 아닌 그 유명한 알프스였다. 그 온천을 검색해보니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알프스는 스위스에서만 만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돌로미티 in 이태리. 그렇게 이 곳이 바로 내가 이번에 향할 곳이 되었다.


원래 여행지는 이탈리아 로마였다. 1주일간의 휴가라 여유롭게 로마도 구경하고, 반짝이는 지중해로 아름답다는 남부지역들을 둘러볼 참이었는데. 여행을 출발하기 사흘을 남겨두고 그 온천사진을 마주해버린 나는 로마로부터 기차로 8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이 과감한 결정에 잇따른 여행 첫날 나는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라는 옛말이 떠올랐다. 긴 비행과 긴 기차 여정을 달려 드디어 이태리 북부로 도착한 첫 날 나는, 몸저 누웠다. 허리가 찌릿하더니 도저히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정도는 해봤어도, '읍?!'하고 허리때문에 말도 안나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자고 일어나니 괜찮았지만..


볼짜노(Bolzano)라는 마을에 묵었다. 긴 여정 끝에 돌이켜보면 가장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을이다. 첫인상은 아담한 마을 중심가에 들어선 동네 상인들의 자그만한 축제 마당이었다. 인근 농장에서 만든 꿀냄새와 담금술냄새가 가득이고, 아이들의 장난에 마른풀들이 떠다니는 곳. 넓찍하니 깨끗한 거리 사이사이에 야외테이블로 손님들이 가득 차, 한적하면서도 복작이는 느낌이 가미된 곳. 눈에 띄게 대형견들을 키우는 견주들이 많아 차분하고도 어른스런 느낌을 풍기는 마을. 묘한 매력이 감도는 볼짜노, 나같이 나대는 내향인에겐 딱 맞는 곳.



세금불포함 박당 25만원에 숙소 이름에 호텔이 들어갔지만, 내가 상상한 그런 "호텔"은 아니었다. 포시락 거리는 두터운 이불도 시원한 냉기를 뿜는 에어컨도 없었지만, 나는 그곳이 그립다. 1층은 레스토랑 겸 바 이자 2층은 주인집에 3~5층은 숙소로 운영되는 그런 정겨운 곳. 열릴때 삐그덕 소리가 나는 창문엔 노란 체크무늬 천이 커텐삼아 달려있고, 아이보리색 이불과 어울리는 퀄트 카펫이 따뜻하게 어우러진 방이었다. 다음날 아침, 알프스를 영접하기 위해 새벽 일찍 눈을 떠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가벼운 트래킹을 앞두고 속을 든든히 하기 위해 숙소 1층으로 내려갔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침 7시 빵향기로 가득 찬 이 곳은 바로 부풀어 오르는 노곤한 빵을 머리 속으로 연상케 했다. 그날 아침으로 먹은 한 입의 크로와상에 이은 커피는 여전히 그 따뜻한 버터향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포곤해진다. 알프스를 만나기 위한 완벽했던 그 아침.



볼짜노에서 오르테세이(Ortesei)까지는 버스로 1시간 걸렸다. 가는 길에 잠을 자두고 싶었지만, 1시간 내내 펼쳐진 이태리 북부의 커다란 자연경관에 쉬이 눈을 감지 못했다. 컸다, 개울도 나무도 산도 모든 자연이. 신기할 정도로 페인트가 벗겨지지 않은 깨끗한 집들이 산 속 중간중간 튀어나와 구경하는 재미를 가미했다.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는 소문에 앞섰던 걱정과 달리 하늘은 점점 맑아져갔고 구름 한 점 찾아오지 않은 깨끗한 날이었다. 버스에 내려 한가득 숨을 몸에 채운 다음 알프스산맥을 펼쳐다 볼 수 있는 세체다(Seceda)로 향하기 위해 케이블카 탑승처로 향했다. 살짝 흔들리는 케이블카의 달달거림에 익숙해질 찰나 푸른 잔디에서 점점 갈색의 평야로 이어지는 풍경이 펼쳐졌다. 꼭대기에 다다를 즈음 온통 하얗게 덮힌 알프스만이 빼꼼였다.



케이블카가 정상에 도착하고 성큼 한 발 땅으로 내디딜 즈음 불어온 바람에 아득했다. 홀린듯 두 눈이 좇은 그 바람의 끝엔 새하얀 안개가 비밀스럽게 뒤덮힌, 그것이 바로 나의 첫 알프스였다. 먼 길을 달리고 달려 다다른 신비하고도 광활한 자연 그 자체. 흡사 커튼콜을 연상시키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안개가 걷히고 드넓은 산맥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새벽 일찍 출발한 보람을 느꼈다. 좀만 늦었으면 이 완벽한 입장을 보지 못할 뻔 했으니. 사람 손 길이 닿을 수가 없어 고요하고도 근엄한 곳. 이 어마어마함에 다 다랐음에 대자연에 비하면 손톱만한 내 심장은 연신 뛰었다.


알프스를 마주한 순간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알프스와 나 둘만이 마주하고 있는 벅참이 밀어올렸다. 그리고 그 대단함을 바로 눈 앞에 둔 순간 깨달았다, 대단함을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가 대단해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그런 자신이 귀여워 웃음이 났을 정도다. 여길 향하기 위한 그 긴 여정과 노고가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절실히 알게 된 순간이었다. 알프스와 독대한 순간 풍족하게 채워지는 나 자신을 위한 것.



날 유혹했던 알프스를 바라보는 온천가게도 방문했다. 볼짜노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이 걸려 도착한 그 곳은 굽이굽이 개울가가 흐르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작은 개울가를 지나 온천에 다다를 즈음 큰 냇가를 발견하고, 온천과 개울이 둘러싼 마을이라니 촉촉한 공기마저 부드러운 곳이라고 느꼈다. 온천 입장료를 지불한 다음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사우나향이 가득한 실내를 벗어나 야외 온천으로 향했다. 추워지기 시작하는 겨울의 도입, 온천에서 튄 물이 얼어 미끄러워진 바닥을 조심조심 지나 온천에 들어갔다. 딱 기분 좋을정도로 따뜻하게 달아오른 온천에 나를 맡겨 녹아들자 마자 내 눈 앞에 펼쳐진건 다름아닌 어제 산 꼭대기에서 만났던 알프스였다. 그리고 오늘은 산 아래에서 우러른 광활한 그녀였다.



알프스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이 먼 곳까지 긴 여정을 다다르고 어제의 짧은 산행이 주었던 기분좋은 피곤함은 알프스 산으로 둘러싸인 이 온천에서 흐트러져 나갔다. 따뜻한 온천이 차가운 바람을 만나 녹녹히 김을 피어오르는 날씨. 온천에 담겼다가 꺼낸 젖은 손가락으로 차가워진 코 끝을 가만히 두드렸다. 내 두 눈이 연신 향한 알프스 산을 올려다보면 그렇게 나만의 방법으로 인사를 건내 보았다.



돌아온 볼짜노에서 출출한 나는 레스토랑에 갔다. 묵직해진 몸을 마을 한 가운데 자리한 교회가 잘 보이는 야외테이블 한 켠으로 뉘였다. 그 교회는 아침과 저녁에 종을 치는데 여유로운 볼짜노와 완벽히 짝을 이루는 평화이다. 파스타를 시키고, 스프리츠 한 잔을 주문했다. 뉘엿뉘엿 져가는 해질녘 주황색 공기 속에서 나는 두둥실 잠긴채 교회 종소리에 녹녹히 젖어드는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여 본다. 스프리츠는 투명한 귤색 와인 사이로 작은 오렌지 조각을 톡톡 건들이는 기포가 피어오른다. 한적한 기분 사이로 세련된 기분전환이 속속이는 그 자체랄까. 단 4유로로 주문한 이 와인 한잔에게서 이번 이탈리아 북부 여행의 단편을 맛보았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한 완벽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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