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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의 함정

20251006

by 빨간우산

세상에는 여러 가지 조언과 충고로 넘쳐난다. 특히나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소셜 미디어에서 소위 '동기부여'라는 미명 아래 온갖 충고와 조언, 명언들이 난무한다. 그런 말들이란 가만히 살펴보면 대체로 통찰력도 있고 나를 자극하게 하는 힘이 되는 말들이기는 하지만, 쉽게 얻은 것은 역시나 쉽게 나가는 법. 제 아무리 대단한 현자의 깨달음을 담은 명언이라고 해도, 겨우 몇 초간 본 문장으로 나 또한 현자의 깨달음을 손쉽게 얻을 수는 없다. 아무리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 말에 깊은 의미를 담게 되기까지의 오랜 경험과 역경이 동반되었기에 '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과정을 거친 사람에게만 비로소 '깊을' 수 있으며, 따라서 깨달음은 깨달은 자의 몫이지, 한 두 마디의 문장에 담길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부처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금식을 하며 수련을 했기에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었을 것이며, 그 깨달음 또한 그 모든 수행을 거친 부처의 것이지 부처의 말을 옮겨들은 우리의 것이 될 리는 만무하다. 부처가 타개한 이후 그토록 많은 승려들이 부처의 말을 옮기고 설명하고 해석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처의 깨달음에 이른 자가 없다는 사실은 그러한 깨달음의 이치를 증명한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공평한 이치일 지도 모르겠다. 깨달음이 문장으로 전달된다면, 지금과 같은 소셜 미디어 시대라면 전 세계의 모든 이가 일순간에 해탈에 이르게 될 테니 말이다. 깨달음이 Copy & Paste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결국, 부처의 깨달음은 부처에게 속한 깨달음일 뿐이다. 그러니 우린 우리 각자만의 깨달음을 추구해야 할 일이다. 깨달을 수 있다면 말이다.


깨달음의 그런 이치 때문에, 역시 조언이나 충고, 명언 따위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만약 어떤 명언을 보고 크게 깨우쳐 인생을 달리 살게 된 이가 있다면, 그건 그가 살아온 과정을 통해 어떤 깨우침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그저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명언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자기 나름의 깨우침을 다른 계기를 통해서라도 얻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런 깨달음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깨달음'이라는 말은 부담스럽다. '깨우침'이라 해도 그 부담은 가시지 않는다. 뭔가 대단한 수련이나 고행을 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그저 어떤 '자각'이라고 해두자. 세상과 삶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저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해석이 아닌, 어떤 세상과 삶을 관통하는 원리나 본질에 대한 '자각'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해도 너무 거창하기는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그런 자각의 순간을 맞아본 적은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삶을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는 얘기이니, 삶을 이렇게 대충 살아서는 안된다는 '자각'이 필요하리라). 그럼 이런 자각은 언제 찾아오는가? 아무래도 그건 우리가 피하고 싶은 여러 가지 고통과 어려움의 순간들, 상처와 아픔의 순간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도록 꼬여버린 상황을 거치고 나면 어느 순간 번뜩이며 찾아오곤 한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나 자각이란 건, 세상의 몇 안 되는 공평한 이치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 고통과 아픔, 혼란과 난항을 겪지 않는다면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과 자각의 이치가 공평해서 다행이라지만, 그렇다면 인생의 나름대로의 깨달음, 자각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고통과 혼란을 겪어야 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아무런 깨달음도 필요 없으니, 평온하고 행복하게만 살기만을 바래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삶의 딜레마와도 같은 질문이겠지만 사실, 삶의 고통과 혼란이라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가 아무런 고통도 혼란도, 슬픔도 아픔도, 갈등도 상처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혹여 그런 모든 어려움들을 겪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일년 내내 아무런 고통 없이 평온하고 안전하기만 한 삶을 보내고 있다면(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는 매우 권태로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태라는 것은 나에게 닥쳐오는 온갖 사련을 겪어내는 고통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경험일 수밖에 없다. 당장 하루 종일 하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이, 어떤 목표도 과제도 없이, 어떤 배움이나 즐김의 취미도 없이, 가만히 있어보면 알 수 있다. 권태가 그 어떤 고통보다도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는 것을.


그러니, 우리 인생은 무언가 어떤 것을 하도록 추동될 수밖에 없고, 그 어떤 무언가라도 하게 되면 고통과 혼란, 갈등과 좌절 같은 경험은 필수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똑같이 어려운 과정을 겪어나가는데 누구는 어떤 자각에 이르고, 누구는 아무런 작은 깨우침이나 통찰에도 이르지 못한 채, 그저 불평불만만을 되뇌이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경험과 그에 동반되는 고통과 혼란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그 모든 경험들을 내가 적극적으로 싸우고 또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경험의 의미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그 모든 경험이 나를 통과하여 지나감으로써 나에게 쌓이지 못하는 반면에, 누군가는 작은 경험이라도 적극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정보 습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어떤 요리의 레시피에 관한 정보는 인터넷에 널려 있고, 심지어 누군가가 정제하여 추천도 해놓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 요리의 대가가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 정보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그것은 경험된 것도 아니다. 그 정보(레시피)는 단지 글자에 불과하며 그것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체가 필요하다. 정보에 불과했던 글자들이 인간의 신체를 통해 경험되고 훈련되고 해석되고 재창조될 때, 그 정보(레시피)는 단지 정보가 아닌 그것을 행한 사람에게 속한 '깨우침'이 되는 것이다. 즉 체득된 정보가 되며 그때는 더 이상 정보가 아닌, 그 자신만의 레시피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똑같은 레시피라 하여도 그 레시피를 체득한 사람과 체득하지 못한 사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체득하지 못한 사람에게 그 레시피는 정보에 불과하지만, 체득한 사람에게 그 레시피는 정보가 아닌 내 몸에 '체화된 능력'이 되는 것이다. 정보와 능력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정보는 그에게 단지 글자에 불과하지만, 능력은 그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니, 오늘도 피드와 쇼츠를 보며 온갖 조언과 명언, 동기부여 영상을 돌려보는 행위는 이제 그만 멈추자. 그 모든 조언과 명언들은 그 조언을 하고 명언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것이지, 그것을 듣는다고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본 것은 '깨우침'이나 '자각', '체득된 능력'이 아닌, 그저 '글자'에 불과하다. 글자는 내 눈의 망막과 내 귀의 고막을 잠깐 스치고 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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