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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본질이 물질주의자인 인간

셀린느 송, <머티리얼리스트>

by 빨간우산

오랜만에 영화 한 편을 봤다. 제목은 <머티리얼리스트(Materialist)>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직역하자면 <물질주의자> 정도가 될 것이다. 왜 '물질주의자'로 번역하지 않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번역자여도 영화 제목을 '물질주의자'로 하는 건 아무래도 무성의하다. 결정적으로 영화를 보도록 유도하는 데는 매우 무기력하고, 심지어는 영화 보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혹은 방해하게 만드는 제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티리얼리스트'는 효과적일까,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의문이다. 실제로 나는 '오랜만에 영화나 볼까' 하는 준비된 심정으로 넷플릭스에 접속했음에도, 이 영화를 클릭하는 데는 꽤나 주저했으니 말이다. 그럼 어떤 제목이 좀 더 나을까.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나 쉽지 않다. 누군가 해 놓은 것을 비판하긴 쉬워도 대안을 제시하는 건 어렵다. 영화의 내용을 고려하여, <물질적인 사랑>, <결혼은 비즈니스>, <사랑보단 돈이 좋아>와 같은 제목을 떠올려보았는데, 역시나 차라리 <머티리얼리스트>가 낫겠다 싶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영어 원제를 그대로 쓰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직역은 우선 안 되고, 주제나 줄거리를 고려하여 의역을 해보아도 여전히 석연치 않을 때, 그러니까 원제인 'Ghost'를 <사랑과 영혼>으로 번역한 정도의 '그래 이거다!' 싶은 대안이 없을 땐 차라리 영어 원제의 발음을 그대로 표기하는 게 낫다. 그럼 최소한 촌스럽거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을 테니. <본 아이덴티티>나, <쉐이프 오브 워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제목들이 그렇다. <모든 것이 언제나 한 번에>는 역시 안 되는 것이다. <물의 모양>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 영화는 의역한 번역인 <사랑의 모양>이 부제처럼 달려 있다. 꽤나 괜찮은 제목인데, 아마도 외화 수입사 내부에서 회의를 거쳐 원제를 그대로 쓰는 <쉐이프 오브 워터>가 다수결로 결정되었지만 의역한 제목에 대한 지지도 나름 높게 나와 버리기 아까운 마음에 부제처럼 쓴 게 아닐까 싶다.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영화제목이 마음에 조금 걸렸지만 간략하게 소개된 줄거리를 보고 괜찮겠다 싶어 주저 없이 '시작' 버튼을 눌렀다. 결과적으로는 기대 이상의 만족!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나 누군가의 추천 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선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은 아무래도 아무런 기대치가 없기 때문에 웬만하면 만족스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간혹 꽤나 괜찮은 영화를 만나게 될 때는, 사람들이 없는 낚시터에서 월척을 건진 듯한 쾌감을 누릴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완성도를 갖춘 만족스러운 영화였고, 무엇보다 제목이나 줄거리를 보고 영화에 기대했던 문제의식이랄까, 주제의식이랄까, 이런 것에 크게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결국 물질보다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그 뻔한 메시지를 뻔하게 않게, 요즘 시대의 맥락에 맞게, 결코 얕지 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풀어낸 인상을 주었기에 더더욱 마음에 크게 울렸던 영화다. 영화나 드라마가 괜찮으면,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제작진의 리스트를 자세히 훑곤 하는데, 역시나 감독이 '셀린느 송'.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의 그 감독이다(그러고 보니 이 영화도 원제를 그대로 표기했군. '전생(前生)'이나 '과거의 삶' 같은 제목으로는 역시 역부족이다). 이 영화에 대한 추천과 소문은 익히 들어왔고, 꼭 봐야 하는 나의 'To See List' 영화 목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다. 공교롭게도 <머티리얼리스트>를 먼저 보게 되었지만, 이 영화에 대한 만족스러운 감흥 때문에 <패스트 라이브즈>를 빨리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돈보다 사랑이 중요해'라는 뻔한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 이 영화가, 왜 이토록 여운이 길게 남는가. 그건 아마도 지금의 시대 탓인 것 같다. 아마도 감독 또한 그 때문에 각본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겠지. 영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다코타 존슨 / 루시 역)은 결혼정보회사의 매칭매니저다. 그녀는 꽤 많은 실적을 가진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과거에 연애를 했었던 가난한 배우인 남자친구(크리스 에반스 / 존 역)를 잊지 못한다. 남자친구 역시 그렇다. 그러다 어떤 잘 생기고 키 큰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부자의 중년 남성이 주인공에게 접근하고 연애를 하게 되지만... 뭐, 이런 식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 줄거리만 보자면 역시나 너무너무 뻔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돈에 비해 사랑을 추켜세우는 단순한 줄거리에 있지 않다. 역시 좋은 영화는 이야기의 큰 줄기보다는 작은 가지에서 그 빛을 발한다. 결혼정보회사에 커플 매칭을 의뢰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 감독은 이들의 모습과 요구사항들을 인터뷰하듯 깨알같이 늘어놓으며 보여준다. 아마도 물질과 스펙이 모든 것이 된 지금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고자 함이겠지. 그리고 그들이, 또한 주인공들이 결혼과 사랑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가령 결혼을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대화 같은 것들. 결혼 상대의 가성비와 속성들을 상품처럼 하나하나 따지며 셈하는 태도 같은 것들. 문제는 단지 그들의 태도와 말들의 적나라함에 있지 않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의 그런 풍경이 보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공감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풍경이란 사랑의 위대함을 추켜세우기 위해 미리 깔아 둔, 후반부의 감동의 배가를 위한 사전 장치 같은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200여 년이 넘어가고 물질주의가 사회를 장악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 물질주의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조명하는 영화가 굳이 지금 시대에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 물질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인생에서의 중요한 판단에 있어 당연하고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물질우선주의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견고하게 안착되었고,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가(단지 연애, 결혼만이 아닌) 인간 대 인간이 마음을 나누는 관계라기보다는, 하나의 교환관계, 거래관계, 흥정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발생하는 권력의 위계에 따라 갑을이 나누어지고, 지금의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관계에 '갑과 을'을 은연중에, 혹은 적나라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갑을의 관계, 교환의 관계를 우리는 연애와 결혼뿐 아니라 부모자식 간에도, 형제간에도, 친구 간에도 너무나 당연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 실제 거래 관계나 이해관계가 얽힌 비즈니스에서는 더더욱 당연히 갑을의 위치가 정해지고 그것이 관계의 형식을 장악한다. 중요한 점은, 그런 비즈니스에서의 갑을 관계가 비즈니스가 아닌 관계에서도 관계의 본질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마음이나 서로에 대한 온기 같은 것은 주변부로 전락하는 것을 넘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21세기에는 모든 관계가 거래 상의 '갑을'로 귀결되었고,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 되었고, 그것이 관계의 모든 것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관계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생각해 보면 그건 참담한 광경이다(불과 20~30년 전, 80년대나 90년대의 풍경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변화가 얼마나 급속도록 빠르게 진행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때에도 물질주의는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지만, 이에 저항하는 인간의 관계, 인간의 가치와 문화 또한 공존하고 있었고, 관계의 본질은 물질보다는 오히려 인간성에 더 가까웠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며 하염없이 우는 형제들을 보여주는 첫 장면에서부터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우리는 그런 인간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원시시대의 사냥하는 남자와 동굴에서 집을 지키는 여자 간의 결혼을 비춰주며 시작하는데, 그런 광경을 영화의 시작에 배치한 것은 이 영화에 대한, 그리고 이 시대에 대한 감독의 문제의식을 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냥과 살림이라는 배분된 역할을 통해 삶의 안정성을 이루고자 했던 원시 시대의 계약적 관계가 지금의 21세기의 현대사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기 위함이 아닐지.


김애란 작가의 최근작인 『안녕이라 그랬어』는 이 영화에서처럼 관계가 비즈니스화되어 가고 거래와 교환이 관계의 형식과 태도를 지배하는 지금의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소설을 리뷰하며 이런 제목을 남겼다. 「네 이웃을 네 돈과 같이」 그리고 이 글에서 신형철은 '존재론적 단계의 신자유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물질과 거래가 모든 것이 되어버린, 관계의 본질이자 존재의 방식이 되어버린 지금의 시대를 신자유주의가 '존재론적 단계'에 이르렀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그런 인간이 된 것이다. 존재의 본질이 물질주의자인 인간. 관계 또한 그렇다. 관계의 본질은 거래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제목은 - 장르가 로맨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 <물질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어 원제라고 이 제목이 흥행에 매력적이었겠는가. 아마도 이 제목 또한 극본을 쓴 감독의 의지였으리라. 그리고 국내 제목을 <머티리얼리스트>라고 옮긴 번역자의 마음 또한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극본: 셀린느 송

감독: 셀린느 송

출연: 다코타 존슨, 크리스 에반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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