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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에 대하여

셀린느 송, <패스트 라이브즈>

by 빨간우산

※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감상평입니다. 줄거리 상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어요.


며칠 전에 본 <머티리얼리스트>의 감흥을 이어가기 위해 셀린느 송 감독의 작품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를 보았다.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작품상, 각본상 후보에 올라 화제가 된 이 작품은 셀린느 송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데뷔작이다. 데뷔작이 이토록이나 크게 호평을 받았으니, 감독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란 그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닐까. 특별한 효과도 장치도 없이, 서울과 뉴욕의 일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예산도 많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제작사로서는 투자한 가치를 훨씬 뛰어넘고도 남았으리라. 주연을 맡은 무명의 배우들은 또 어떠했겠나.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유태오 배우는 유퀴즈에 출연해 눈물을 보였으니, 그간의 회한과 기쁨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저예산 영화 한 편의 성공이 참여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행복이란 이토록이나 크고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너무도 훌륭한 각본과 연출을 보여준, 감독의 창의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좋은 영화란 여운이 길-게 남고 보고 난 후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만드는데, 나에겐 이 영화가 그렇다. 영화를 본 지 하루가 지났건만 아직도 이 영화가 준 애잔한 감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헤어짐의 장면의 긴- 롱테이크는 영화사에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남을만하다.


nolisoliph-1024x549.jpg 영화의 마지막 신


불교의 윤회설에 기반한 전생(前生)이라는 개념을 모티브로 하여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신비에 대해 다룬다. 우리 동양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작은 인연이 반복되는 생을 통해 쌓이고 나면 어느 생에 이르러서는 연인, 부부라는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연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 그래서 그 인연이란 것은 생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것이므로 인간의 힘으로 인위적으로 이어 붙이거나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는 게 아마도 인연이란 말의 신비로움일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합리주의적 사고로는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도 어려운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연이란 말의 그런 신비 때문에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과의 관계를 단순히 언제 만나 어떻게 알게 된 사이로서만이 아닌, 생의 시공간을 넘어 이어지는 단단한 끈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운명적 소중함이 얼마나 크게 느껴지겠는가. 그리고 인연의 그런 신비는 단지 만남에 대해서만 적용되지 않는다. 헤어짐에 있어서도 인연은 우리를 다른 생각, 다른 감정으로 데려간다. 지금 헤어지게 되더라도, 이것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는, 다음 생에서의 만남을 위한 준비라는, 정말이지 헤어짐의 아픔을 이토록 그럴듯하게 위로할 수 있는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인연이란 것이, 전생이나 윤회라는 개념이, 사실이냐 아니냐, 믿을만한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별로 현명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만남을 그리고 헤어짐을 이토록이나 우주적인 관점에서 애틋하게 이어주고 있는데, 그것을 굳이 논리적으로 반박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게 무엇일까. 게다가 인연이나 윤회 또한 신(神)이나 진리처럼 완전하게 증명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래도 설득이 필요하다면, 과학적으로도 설명해 볼 수 있다. 최근 유퀴즈에 출연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말을 인용하지만, 우리는 '원자'의 형태로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 존재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속한 원자가 죽음 이후에도 또한 어딘가로 흘러들어 다른 생명체에 귀속되어 우리와 인연이 있었던 다른 사람의 사후의 원자가 귀속된 무언가와 만난다면(영화 속에서 말하듯, 나뭇가지와 나뭇잎의 관계일 수도 있다), 그것 또한 인연이 아닐까. 역시나 이렇게 설명하니 인연의 감흥이 확 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역시나 과학은 차갑고 매력 없는 학문이다).


Past_Lives.JPG 영화의 첫 장면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인연에 대해 다른 식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인연이란 관계는 단지 친구, 연인, 부부와 같은 세속적인 관계의 형식으로 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인연의 다른 차원은 이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두 남자(동양인과 백인) 사이의 한 여성(동양인)을 정면으로 비춰주며 시작한다. 세 사람은 늦은 밤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왼편의 동양인 남성과 중앙의 동양인 여성이 서로 마주 보며 대화하고 있고, 오른편의 백인 남성은 소외된 듯 그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다. 나래이션이 시작된다. "저 세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요?" 친오빠와 여동생, 여동생의 남편이라는 추측에서 관광 온 아시아 여행객과 현지인 가이드라는 추측가지 다양하지만, 선뜻 확신할 수 없다. 나래이션의 질문으로 인해 보는 사람도 같이 추측해 보지만, 역시나 어떤 추측도 석연치는 않다. 영화는 이 세 사람, 특히 두 동양인 남녀의 관계를 따라가며 진행된다. 영화의 제목인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인연은 두 동양인 남녀의 관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영화는 어릴 적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이어져 오는 그들의 인연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큰 사건이 있지도 않고 눈에 띄는 갈등이 있지도 않은 그 둘의 관계의 특징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에 있다. 그들은 서로 만나려고 노력하지도, 헤어지려고 결심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삶의 운명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도록 이끈다. 연애를 할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역시나 그들을 떨어뜨려 놓은 먼 거리의 운명이 그들의 결합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다시 재회하게 되지만 또다시 헤어짐을 감당해야 한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에 역시나 큰 사건과 갈등은 없다. 하지만 보는 이는 그 담담한 만남과 헤어짐의 행간에 흐르는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연인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지만 연인이나 부부 이상으로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서로롤 평생 잊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관계를 어떤 사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영화의 첫 장면에서 소외된 백인 남성은 여성의 남편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남편은 이미 둘 사이의 인연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는 작가이고 '인연'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성으로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기에, 그 둘을 의심이나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거꾸로 그 남성은 아내와 자신은 어떤 인연일까를 고민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불륜이나 바람과 같은 도덕에 속한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혹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참으로 닫힌 마음과 좁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인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인연이라는 단어 앞에, 그리고 이 둘의 인연의 역사를 보는 이 영화 앞에서, 우리는 연인이나 부부라는 관계의 형식, 관계를 그렇게 정의하자는 사회적 약속 같은 것들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게 된다. 어릴 적부터 이어지는 이 둘의 평생의 인연을 우리는 과연 어떤 관계의 형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정의한다 한들, 그 관계의 질을 간단한 정의 속에 가둘 수 있을까? 가두려 한들 가두어질 수 있을까? '인연'이라는 말, 그 둘의 끊기지 않는 이어짐이란 그렇게 인간의 개념이나 정의, 사회적 약속으로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영화에서 '인연'이라는 말이 그토록 자주 반복해서 등장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를 어떤 사회적 규범의 틀로 가두지 말고 보아 달라는 감독의 권유 혹은 간청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기 위해 영화는 전생과 윤회와 같은 말들을 동원하여, 이 좁은 인간 사회를 넘어 우주적인 세계관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확장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래야지만 이 둘의 관계가 단순히 불륜이 아님을, 부부와 연인이라는 형식으로는 담을 수 없음을, 그 이상의 다른 관계이자 인연임을, 오해가 없으면서도 밀도 있게 보여줄 수 있었으리라. 결국 그들은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그 어떤 관계보다도 더 애틋하고 그립고 간절한 사이인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둘의 사이는 '사랑'이라는 말로도 담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인연'이라는 말이, '전생'을 넘어 '현생'과 '후생'으로 이어지는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라는 말이 오히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그들의 애틋한 관계를 드러내는데 필요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랑이나 우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란 그렇게 몇 가지 형식으로 간단히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관계에 대한 열린 생각을 권유하는 작품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열린 생각으로 가만히 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때서야 두드러지게 보이는 한 두 사람이 생각날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 정의할 수 없지만, 단순히 서로 간의 감정과 약속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어쩐지 이어져 있고 계속 이어질 것만 같은 관계.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자주 보든 전혀 보지 못하든, 언제 만났고 언제 헤어졌든 상관없이, 항상 생각나고 그립고 이어져 있는 사람.


1697929059.jpg 누구든 인연의 관계는 있다


영화의 마지막 헤어짐의 장면은 긴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이어져 있던 인연이 이번 생의 마지막에 도달했음을 안타까워하는 감독의 배려가 짙게 배어있는 연출이다. 보는 이도 그 안타까움과 상실감을 긴 롱테이크 신을 통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은 더 친절하게 감독은 여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둘 사이의 인연의 뿌리와 의미를 보여준다. "네가 좋아했던 그 아이는 여기 없어. 하지만 여기에 없다고 해서 그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야. 나는 그 아이를 어릴 적 네 마음에 남겨두고 온 거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대사였던 듯) 폴 오스터의 마지막 유작 소설인 『바움가트너』도 비슷한 주제를 말하는 이야기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 늙은 남성의 이야기인데, 아내는 죽고 없지만 아내의 생물학적 죽음이 곧 아내의 존재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어쩌면 한 사람의 존재란, 관계 속에서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 관계가 생을 넘어 인연으로 이어진다면, 우리의 존재는 우리와 인연이 있는 여러 사람과의 생을 넘는 관계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건 아닐까. 영화를 보고 너무 장황하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일까. 하지만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의 존재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생물학적 죽음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의 존재를 사라지게 할 순 없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등장하는 명대사가 생각난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총알이 심장을 관통했을 때? 아니! 불치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수프를 마셨을 때? 아니!"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 Dr. 히루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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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본: 셀린느 송

감독: 셀린느 송

출연: 그레타 리, 조태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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