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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걸까...

우린 누구와 싸워야 하는 것일까

by radioholic
30~40대 기사들은 AI 수법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죠. AI가 어떤 제안을 해줘도 '난 이렇게 못 둬. 이게 뭐야' 하면서 겉으로만 훑거나 '그냥 내가 두던 대로 두겠다' 하고 자기 편한 대로 두거나. 그러면 그게 결과로 나오거든요. 발전도 없고 계속 져요. 그러니까 다들 '어쩔 수 없구나' 하고 AI를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승부에만 초점이 맞춰지면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오정아 5단)
- 장강명, <먼저 온 미래> 中


장강명 작가는 저서 <먼저 온 미래>에서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이후의 바둑계가 처한 현실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한, 아니 이미 와버린 AI 시대를 대하는 우리 인간들의 상황을 담담하면서도 진지하게 고민한다.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믿었던 바둑마저 인간이 인공지능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바둑을 잘 모르는 우리에게도 충격이었지만 바둑기사들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이었다. 그들이 수없이 많은 기보를 공부하고 공동연구를 통해 갈고닦으며 예술의 영역이라 믿었던 바둑이, 엄청난 연산능력을 가진 AI에겐 그저 불과 몇 초 만에 계산이 끝나버리는 확률게임으로 전락해 버린 것에 대한 좌절이었을 것이다.


2주일 정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너무 충격이 커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러면서 뭘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잠도 거의 못 잤어요. 세돌이 형이 2국에서 졌을 때 몇몇 기사와 호텔에서 함께 밤을 새우면서 복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세돌이 형 부인이 저한테 연락을 하셨어요. '혹시 멀리 있지 않으면 너도 와서 도와주면서 같이 있어줄래' 하고요. 그런데 제가 못 가겠다고 했어요. '형수님, 제가 지금 너무 충격을 크게 받아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하고요.(송태곤 9단)
- 장강명, <먼저 온 미래> 中


이세돌-알파고 대국 이후 바둑계가 받은 충격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출처 : SBS 뉴스)




오늘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왔다. 아주 간만에 극장에 가서 기분전환이나 하자던 의도와 달리, 나와 와이프는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좀처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로 헛헛한 웃음과 의미 없는 탄식을 주고받으며 걷다가 문득 와이프가 말했다.


이 영화... 우리한테 하는 말인 건가?


40대를 넘기고 직장에서 중견을 넘어 시니어의 문턱을 밟고 있는 우리에게는, 직장을 잃고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어떤 짓도 불사하는 주인공 만수(이병헌)의 모습은 그저 영화 속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눈에 밟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전문적인 자격증도 없고 그렇다고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나 같은 중년 남자가 회사에서 내동댕이쳐진다는 것은 사실상 사회적인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는 그렇게 사회적 사형 선고를 받은 한 남자의 극단적인 몸부림을 조용히 응시한다.


만약 내가 영화 속 만수의 처지였다면... 난 어떻게 생존을 도모했을까(출처 : 영화 '어쩔수가없다' 中)


해고로 인한 실직 이후의 위태로운 삶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은 수없이 많지만, '어쩔수가없다'가 유난히 무겁게 내 마음을 짓누른 이유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악덕업주나 나쁜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 아님을 조금 과장되었을지언정 솔직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기에 기계가 공장에서 노동자를 몰아내었던 역사가 이젠 AI로 대표되는 '非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더 큰 양상으로 반복되고, 내몰린 사람들은 남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마치 의자뺏기 놀이를 하듯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해야 하는 비극이 벌어지게 되었음을 영화는 아주 아프게 꼬집는다.


영화 속 만수는 평생을 몸담아온 제지업에서 일자리를 다시 얻기 위해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미리 제거해 버릴 마음을 먹는다. 그것이 이루어졌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을 먹을 정도로 사람을 궁지로 모는 비정한 사회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이다. 분명 사회는 진화하고 문명은 발전했다는데 왜 사람들은 여유로워지긴커녕 점점 불안해져야 하는 것일까. 지금 논의되고 있는 주 4.5일제를 반기다가도 이내 주저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과연 주 4.5일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여력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늘어나는 쉬는 시간에 차라리 특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테니까.




은퇴 후의 숲 해설사도, 해외에서의 여행 가이드도, 국제회의의 통역사도 사람들이 나름의 준비를 치열히 하며 꿈꾸는 직업입니다. 그 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복병은 인간인 우리가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십만 양병설의 준비도 무력화할 만큼 새로운 AI 군단은 밥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노조에 가입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전기만 공급하면 3교대를 마다치 않는 군대와 같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신출귀몰한 군대와 싸우는 것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도 이기기 어려운 전투였습니다. '망자의 군대'와 대치한 육신을 가진 인류는 이제 일전을 피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해 나갈 것입니다.
- 송길영, <시대예보 : 경량문명의 탄생> 中


송길영 작가는 <시대예보 : 경량문명의 탄생>에서 AI의 시대에는 결국 일의 단계가 축약되면서 일을 위해 투입되는 인력의 총수가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분명히 정확한 지적이고 피할 수 없는 현상임을 알지만, 그 과정에서 '급격히' 줄어드는 사람들 속에 내가 포함된다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영화 속 만수도, 그리고 변화하는 세상에서 고용 불안에 직면한 직장인들도 아직 그 변화의 빠른 물결에 올라탈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AI에 맞설 능력도 준비도 안된 사람들은 결국 AI가 남긴 빵부스러기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할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갈등하고 서로를 짓밟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양태는 AI가 고차원적이고 중요한 업무를 차지하고 남은 소수의 자리를 얻기 위한 눈물겨운 쟁투가 아닐까. 지금도 적은 일자리와 높은 실업률에 신음하고 있는 인간들이, 앞으로는 그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그런 세상이 올 것 같아 두렵다. '어쩔수가없다'라는 영화를 보고 한없이 무거워진 마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영화 속 만수는 결국 나를 포함한 이 시대의 피고용인들의 어두운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AI 시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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