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모든 즐거움은 저기에서 시작되었지
그럼 난 어른이 되어도 계속 노래할래요
그런데 이상해 그때부터 그런 건 하지 말아라
하지 말라는 건 언제나 하고 싶어 지는걸
미안해요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도레미파솔라시도 노래를
그 무엇보다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조원선, '도레미파솔라시도' 中)
중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음악 선생님이 있다. 지금도 나랑 가장 친한 친구 녀석과 그분 이름만 말해도 웃음이 터지곤 하는 건, 그분이 지닌 아주 독특한 캐릭터 때문이다. 대략 50대에 커트와 단발 사이의 짧은 머리를 고수하셨던 그분은 언제나 화가 나 있었다. 조금만 떠들어도, 질문에 대답을 못해도, 그냥 본인 기분이 별로여도 고성과 함께 회초리로 교탁을 마구 두드리시고 수시로 체벌을 하셨던 분.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표정이 유독 안 좋을 때면, 그 혈기왕성했던 중학교 남학생들도 허둥지둥 자리에 앉으며 기가 죽었더랬다.
공교롭게도 난 그녀에게 참 많이도 혼나고 종종 회초리로 맞았다. 중2병을 심하게 앓으며 선생님들의 애를 먹였던 나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녀가 쇳소리 섞인 하이톤으로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 오늘 또 맞는 건가'란 생각이 들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 선생님은 그 당시엔 없었던 말인 '츤데레'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렇게 학생들을 혼내고 때리셨어도 묵혀둔 감정 없이, 다음날이면 '어이~ㅇㅇㅇ'라고 이름을 불러주며 장난 섞인 안부를 물어주는 그런 사람.
다만 내가 그녀를 끝내 좋아하지 못했던 것은, 그분의 수업방식이 음악을 즐기는 것이 아닌 지겨운 공부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수업이 장조와 단조, 각종 음악 이론을 수학공부 하듯 외우고 이해를 못 하면 맞아야 하는 시간이 되면서, 난 음악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지레 포기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고 40대가 되어 기타를 배우면서 접한 음악은 너무나 흥미진진한 세계였고, 그땐 지겹고 어려웠던 음악 이론들도 조금만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지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체계를 갖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려 30년이 지나고서야.
어른의 피아노, 그러니까 중장년이 된 후에 뒤늦게 피아노를 친다는 건 '뜻대로 되지 않음'의 온갖 버전을 체험하는 일이다.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는 굳었고, 노안이라 악보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어른에게는 쓸데없는 허영심도 있어서 잠깐이라도 다른 사람이 듣노라면 어릴 때는 경험해보지 못한 초긴장 상태가 된다. 산 넘어 산이다. 게다가 실력은 조금도 늘지 않는다. 그런데 더 무시무시한 사실은 체력도 시력도 청력도 이미 충분히 엉망인 지금이 바로 인생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나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것이다.
- 이나가키 에미코,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 中
작가인 이나가키 에미코는 기자 생활을 하다가 퇴직 후 50대부터 어린 시절 포기한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 시작한다. 손이 굳고 학습 속도가 더뎌진 시기에 배우는 피아노가 얼마나 삶에 큰 즐거움을 주는지를 묘사하는 문장들을 보면서, 중년의 기타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격하게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음악 생활이 주는 그 희열은 오직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까.
작가의 말처럼 지금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이란 사실은 종종 나를 우울하게 할 때가 있다. 세상엔 연주하고 싶은 곡이 너무나 많은데, 한곡을 완주하기 위해선 몇 주 또는 몇 달을 훌쩍 보내야 하는 것에 대한 조바심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을 떠올리며, 그때 음악에 재미를 붙였더라면 하는 원망을 하곤 한다. 정말 그분이 미워서가 아니라, 난 음악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며 지레 포기를 하고 좀 더 일찍 기타라는 악기를 배우지 못한 나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나온 못난 생각임을 안다.
비록 어른의 악기 생활은 느리고 서툴고 어설픈 그런 답답함의 연속이겠지만, 즐겨 듣고 선망하던 곡을 내 손으로 직접 풀어내는 그 성취감과 흐뭇함은 나도 모르게 기타를 또는 피아노를 다시 치게 만든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칭찬해주지 않아도 오직 내가 즐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비록 좀 더 일찍 시작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늦게 시작했기에 더 절실하고 진지하게 이 즐거움을 좇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조원선의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들으면 뭉클해질 때가 있다. 그냥 누가 뭐래도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싶다고, 하지 말라고 해도 결국엔 해야만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그 순수한 감정이, 지금의 나와는 너무 먼 얘기인 것 같은 심정 때문이다. 이 노래가 담긴 음반이 얼마 전 서울레코드페어에서 재출시되었다는 소식에 행여 품절이 될세라 조바심을 내며 주문을 하고 마침내 배송된 LP를 뜯으며 정말 가슴이 터질 듯이 좋았다. 혼자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있는 저 자켓 사진부터 어쩜 그리도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것일까.
봄이면 꼭 들어야만 할 것 같은 '살랑살랑'이나 '나의 사랑노래'부터, 들으면 한없는 외로움의 감정이 전해지는 '아무도, 아무것도'까지 모든 곡이 좋지만, 요즘 내 마음을 사로잡는 노래는 역시 '도레미파솔라시도'다. 사는 게 점점 재미없고 골치 아픈 일만 늘어나는 어른들에게, 어릴 때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목청껏 외치며 깔깔대던 시절을 떠올려 보라고 슬쩍 옷깃을 잡아 끄는 것만 같아서 그렇다. 결국 인생은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면서 말이다. 음악이 주는 모든 즐거움은 결국 그 7개의 음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기타를 치면 반드시 외워야 한다는 각종 스케일은 그저 도레미파솔라시도의 변형에 불과하다. 메이저니 마이너니 펜타토닉이니 하는 어려운 단어에 주눅이 들지만 사실은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지판 위치에 따라, 음계에 따라 어떻게 쳐야 하는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던가. 다만 기타를 잘 치기 위해선 그것을 반드시 외워야 한다는 강박과 난해한 용어들이 우리를 즐거움 대신 괴로움으로 이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가끔 이렇게 용어와 표현이라는 곁가지에 압도되어 재미란 본질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혹시 요즘의 삶이 지겹고 괴로운 어른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조원선의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꼭 들어보셨으면 좋겠다. 좀 더 시간이 되신다면 위에 소개한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를 읽으시는 것도 추천드린다. 그리고 조금 더 여유가 있으시다면 이 곡이 수록된 조원선 1집을 틀어놓고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를 읽으신다면 어쩌면 내가 느낀 힐링의 감정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사는 게 고달플 때, 예술과 음악은 우리에게 정말 큰 힘을 불어넣어 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