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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noNo Apr 26. 2021

나만의 무기 찾기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시간을 되돌려도 다시 박사 과정을 하시겠어요?' 예/아니오를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겠지만 생각보다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거기엔 조건이 붙고 그 조건에 또 조건이 다닥다닥 따라 붙는다. 가령, 내가 5년 전의 체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5년 전의 체력을 가진 내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으며, 5년 전의 체력을 가지고 앞 날을 전혀 모르는 나이지만 멘탈 만큼은 5년 전의 나보다 한 수 위이고... (그리고 계속되는 부가 조건) ... 라면 자신 있게 하겠습니다! 누군가는 안 하겠다는 말로 해석하겠지만 무 자르듯 명확히 답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예'하기엔 힘들었던 시간들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고 '아니오' 하기엔 그 힘든 시간들이 나를 단단히 키워주었기 때문에.


아마 1년 차의 내가 같은 질문을 받았더라면 아주 쉽게 '아니오' 답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던 기억은 희미해져 미화되고, 좋았던 순간들은 또렷해지기에 예도 아니오도 아닌 회색지대의 조건부 대답이 나올 수밖에.


나의 유학 초기는 실수와 좌절로 점철된, 지루하게 반복되는 시간 연속이었다. 잘도 가던 시간이 왜 수업 때만 되면 이토록 더디 가는지, 읽어야 할 논문은 왜 하나도 재미가 없는지, 주말은 도대체! 왜!! 어째서!!! 이틀뿐인지... 매 학기가 첫 학기와 같았다면 나는 버티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개인 차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확실히 생활면에서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난 두 번째 학기에는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어 확실히 수월했다. 그렇다고 수업의 부담이나 강도가 줄어든 건 아니어서 여전히 자책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흐린 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는 법, 공부가 재밌게 느껴지는 날들도 있었다. 가뭄에 콩나듯 칭찬을 받을 때엔 별 것 아닌데도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 미국 대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가장 큰 장벽이었던 건  발표였는데 전공 특성상 학부나 석사 때에도 발표가 잦지 않았던 터라 부담이 되었다. 더군다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발표를 준비하려면 스크립트를 거의 외우다시피 해야했기에 절대적인 시간이 많이 들어갔다. 다른 부분이 부족해도 말빨(?)로 수월하게 넘길 수 있는 미국 학생들과 다른 나만의 특화된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발표 내용의 얼개를 짠 뒤 파워포인트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데 주력했다. 페이퍼와 달리 짧은 시간에 주요 내용을 제대로 전달해야하는 발표의 특성상 visualization과 핵심을 뽑아내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판단, 임팩트 있고 전달력 높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


그 노력을 알았는지 그룹 발표 때 내가 취합해 만든 발표 슬라이드에 대해 정리가 잘 되었다는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어떤 수업에서는 내가 기말 발표로 정리한 이론적 쟁점에 대해 본인이 학교와서 여지껏 본 발표 자료 중에 가장 명확하다고 말해준 친구도 있었다. 사실 페이퍼 내용으로 보면 내 연구나 발표가 1등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누군가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데에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poster session이라고 해서 자기의 연구 결과를 하나의 포스터로 간결하게 정리해서 붙여 놓고 사람들이 보게 하는 시간이 종종 있다. 중간 기말에서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진 못했던 어떤 수업에서도 poster session에서 친구들 포함 초대 받은 교수님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아 전체 학기 성적에는 고전을 면한 적도 있었다.


이렇듯 나는 각자가 잘하는 무언가는 꼭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외국인 학생은 네이티브 학생들에겐 없는 언어의 장벽이 있기 때문에 실력이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위축되는 경우를 보곤한다. 나 역시도 그랬고 여전히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저마다 자기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할 수 있는 무기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스킬이 아닐지라도 만약 한국인이라면 (그래서 한국어를 읽을 수 있다면) 하다못해 남들은 읽지 못하는 한국어로 된 논문을 읽을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사소해 보이는 무기일지라도 그걸 나를 돋보이게 만드는 방법으로 활용한다면 자신감 획득은 물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만의 무언가를 찾는 데엔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멀리 본다면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뚜렷한 나의 색깔을 찾아가는 멋진 여정이다. (때마침 윤여정 배우님이 한국인 최초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셨다. 정말로 존경합니다! 의식의 흐름 무엇) 암튼, 그런 여행 경비는 아끼지 말도록 하자.



본문 내용과는 상관 없는 낙서들. 저는 어릴 때부터 책에 낙서를 많이 했어요. 저만의 책으로 만드는 비법(?)이자 나름의 멘탈 관리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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