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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만보 Jun 10. 2023

이상한 나라의 할머니

엉겁결에 스타트, 인생 시즌3

60이 딱 되고 나서 (대한민국 국민인 덕분에 아직은 59세다) 여러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천안에서 타향살이 20년 하셨던 부모님이 파주로 이사오셨다. 천안은 남편의 고향이지, 우리집과는 사실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었다. 나는 서울 생이고, 아버지는 평양에서,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IMF 직전 아버지가 전원주택 사업한다고 내려갔다가 눌러 앉게 된, 노랫말을 빌자면, "IMF전, 사업차 갔다가, 살다 정든 곳, 고향 충청도,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쯤 되겠다. 우여곡절 끝에 그곳에 홀로 남겨져 외로이 병든 엄니를 돌보던 아버지가 더는 혼자서 감당이 안 되어 다시 한 번 타향살이를 결심하신 터다. 그것도 내가 사는 곳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오셨다. 파주에서 천안까지 엄마 보러 다니는 데 왕복 6시간 걸렸던 거 생각하면 자전거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정착한 아버지의 이사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모르겠다. 


이사 첫날, 엄마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몇 년 전 아버지가 일을 하셔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엄마를 잠시 요양병원에 모셨는데, 그곳이 바로 파주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때 들어가는 날부터 나갈 궁리를 시작하셨고, 정말로 5일 만에 쇼생크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로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엄마에게 요양원 혹은 요양병원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에겐 내가 그 사건의 주범으로 각인되었기에 "파주=요양병원=나쁜딸" 뭐 이런 공식이 성립한 모양이고, 파주로 온 게 당연히 마뜩치 않으셨을 법하다. 사실, 아침엔 베이글과 아메리카노에 샐러드를 드시고, 김치를 비롯한 한국 음식을 별로 즐기지 않으시고, 하루종일 그림 그리며 클래식방송을 듣는 엄마에게 모든 서비스가 정형화된 한국의 요양병원/요양원은 너무나 맞지 않는다. 나도 안다. 그래서 더는 엄마를 어딘가에 입원시키지 않고 아버지랑 힘을 합쳐 끝까지 돌볼 생각이다.


이제 주3일 근무처로 나가는 날을 빼고는 엄마집에 주4일 가서 엄니를 돌보고 아버지 식사를 챙기면서 살 것이다. 이제 갓 할머니의 문턱에 들어선 younger할매가 older할매를 돌보는 것. 남편이 살 빼라고 사준 자전거를 타고, 머리에 고급진 (이건 내가 직접 샀다) 헬맷을 쓰고, 30분간 달려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다. (자전거 타고 다니려고 어제 기르던 머리를 싹뚝 잘랐다. 그래야 헬맷 벗어도 덜 웃기다.) 이제 더는 서울역과 용산역을 내집 드나들듯 하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효녀라고? 천만의 말씀. 나는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엄마 아버지를 곁에 둔 것도 내가 먼 길 가기 귀찮기 때문이고, 엄마 아버지를 돌보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노년기 내내 가져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나를 먹이고 씻기면서 사람꼴 만들어준 부모님께 딱 그만큼 갚고 싶어서다. 이런 계산적인 할매 같으니라고.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내 인생 시즌3의 첫 번째 막이 올랐다. 나 떨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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