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번역 출간됐다. 이번에는 그가 독자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 기대에 부풀었다.그런데 전작과 달리 이번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몇 가지를 생각해 봤다.
1. 독해력이 모자라서? 평균 정도라 생각한다.
2.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평소 관심 있던 분야다. 그리 낯선 내용은 아니다.
3. 저자의 영어 원문이 복잡하고 어려웠을지도. 하지만 전작을 읽을 땐 문장이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4. 번역이 문제인가? 직역과 어색한 문장이 보인다. 옮긴이는 타 분야 전공자로 번역한 책이 몇 권 안 된다. 온라인 서점에서 찾아보니 절판이거나 검색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해 독자평을 찾아봤지만 출간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리뷰가 없다. 역자는 성의를 다해 번역했을 텐데 책이 이해 안 되는 건 내 문제 아닐까? 여러 번 읽으면 이해되지 않을까? 웬만하면 남 탓 말고 내 탓을 하려 했다. 하지만 다른 이가 작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출판사 이름도 다시 봤다. 왜 전문번역가를 쓰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동시에 예전에 읽은 아쉬웠던 번역서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읽고 싶은 책은 넘친다. 내 독서량은 일주일에 한두 권 정도라 유명 저자의 책, 인문사회, 에세이 식으로 우선순위를 정해 골라 읽는다. 유명 저자의 책이라고 해서, 유명 출판사의 책이라고 해서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건 아니다. 그래도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책은 웬만하면 이해가 된다. 비문이나 오타도 문제없다. 내가 고치면 되니까. 사십 년이나 쓴 모국어니 이해가 안 되면 행간을 읽거나 자의적 해석이라도 한다.
하지만 번역서는 다르다. 번역의 질에 따라 인생 책이 되기도 하고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군더더기 없이 유려하게 번역된 책을 읽을 때면 옮긴이 이름을 다시 본다. 이 분 덕에 태평양 대서양 건너온 양서를 내가 접할 수 있었구나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다. 대부분그런 마음으로 읽는다. 하지만 가끔은 의심스러운 책이 있다. 통째 엉터리인 경우는 없다. 그러면 출간이 안 됐을 테니까. 일부 대목에서 과연 역자가 이 부분을 온전히 이해하고 번역한 게 맞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그런 대목이 많을수록 속상해진다.
그러니 역자를 살피게 된다. 유명 번역가들은 팬층도 있다. 에세이를 출간했거나 방송에 출연하거나 칼럼을 쓰는 분들은 나도 이름을 알 정도다. 전문번역가이고 이미 수많은 역서를 내신 분들의 책을 고르면 실패가 없다. 나는 문학을 거의 읽지 않지만 문학이야말로 번역가의 능력이 더 중요할 것 같다. 전문번역가 외 그 분야 연구자나 교수들도 글이 좋다. 나는 유명 작가의 책일수록 출판사에서 역량 있는 번역가를 써 주었으면 한다.
독자로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바란다. 저자의 글이 길고 난해하다면 역자가 굳이 윤문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색한 번역투, 그러니까 긴 수식어가 붙은 주어, 주어와 너무 먼 술어, '이는'과 '그것은' 같은 대명사의 잦은 사용 등은 불편하다. 독자가 '이 문장을 다시 영어로 바꾸면 혹시 이런 구조가 되는 건가' 하고 역으로 상상하게 하는 번역은 좀... 학창 시절 영문법 수업을 떠올리게 하는 번역은 좀... 고민할 필요 없이 물 흐르듯 읽어 내릴 수 있는 번역서를원한다면 욕심인가.
지난해 읽은 『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사계절, 2018)는 제목 그대로 지중해 - 소아시아 - 중앙아시아 - 중국 - 인도의 천년을 짚어 고대 세계사의 맥을 잡아주는 책이었다. 고대 세계가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로마의 정복 전쟁은 박진감 넘쳤다. 역사 초심자가 천 년을 막힘 없이 읽어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역자의 노력 덕분이었다.
옮긴이 홍지영 님은 "이 책의 번역 작업은 길고 험난했다"면서 "원서의 오류를 70개쯤 발견하여 저자와 공유한 뒤 수정했고, 일부 애매한 부분은 주석으로 보강했다." (p.470) 고 썼다. 번역 과정에서 본인의 부족했던 그리스 로마사 지식을 채우고 싶었다고 한다. 그 욕심이 좋은 번역서를 만든 힘 아니었을지. 모든 역자에게 그런 노력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래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번역서를 꼽을 때면 이 책이 생각난다.
번역가 지인에게 "책 번역은 안 하셔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책 번역, 쉽지 않아요. 독자들 댓글 무서워서......" 나름 애서가인 나는 책에 대한 평가를 삼간다. 평가는 무슨, 책은 곧 저자와의 만남이라 생각하기에 책에 인격을 부여해 읽는다. 한 권의 책이 많은 이의 지력과 노력을 통해 나온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행여 번역가가 내 글을 읽으신다면, 투정이라 생각해 주셨으면.